마산야구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재미있는 기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1923년 5월에 열린 '마산 소년 야구대회'도 그 중의 하나이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4일 자에 보도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 기사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소년야구대회에 8개 팀이나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마산에서 처음 야구부를 만든 창신에서 2개 팀이 참여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늘날 성호초등학교의 전신인 공보(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도 두 팀이 참여한 것이나, 지역사회의 소년 야구팀일 것 같은 주일학교, 사해, 수원, 비룡 등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해 수원 비룡 등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등에 대해 알 길이 없다.

여하튼 두개 팀이 참가한 창신의 전력은 막강했던 것 같다. 공보를 모두 콜드 점수나 다름없는 점수로 대파한데다, 우승까지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콜드패와 같은 규정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공보학생들이 시간 전에 퇴장하였다고 썼으니, 아마 분기탱천했거나 부끄러웠거나였을 것이다. 또한 결승전 상대가 주일학교였으므로, 당시 기독교계통의 학교나 교회 어린이들이 야구를 즐겼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 기사에서 또 주목하여야 할 것은 야구대회가 열린 '구락부운동장'이란 사실이다. 지금은 아직 전모를 다 알기 어렵지만, 1920년에 발족한 마산구락부라는 사회단체가 전용운동장을 만든 것이 1921년이었다. 장소는 오늘날 노산동, 곧 옛 상남동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노비산 바로 아래에 있는 땅 수천평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상남동은 순수한 조선인 사회였다. 또한 이곳을 운동장으로 만든 것도 순전히 마산부민들의 힘이었다. 식민당국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그곳에 필요한 비용, 토지, 인력 등을 자발적으로 모아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마산의 체육사에서뿐만 아니라, 마산지역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라고 할 만하다.

이후 이 구락부 운동장에서는 야구뿐만 아니라 축구, 마라톤, 자전거 경기, 마산부민 체육대회 등이 연이어 열렸다. 마산사람들에게 이곳은 자부심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자전거의 왕으로 불렸던 엄복동 선수도 1923년 4월 29~30일에 열린 마산체육회 주최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이 역시 이 구락부운동장에서 있었던 경사였다.

위의 소년야구대회가 열리기 약 한 달 전의 일이다. 경기 때마다 관중도 수없이 들어차, 위와 같이 소년야구대회에도 수천 명이 입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마산에서 열리는 야구경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구락부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마산이 야구성지인 이유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야구사에서 1920년대는 매우 의미 있는 시대일 것이다. 삼일 운동 이후 자강을 위해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가 극일 차원에서 매우 강조되었고, 그 일환으로 동아일보는 1920년에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또 1922년에는 미국의 프로야구팀이 조선을 방문하여 친선대회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그곳에서 야구를 익히고 방학 중이면 귀국하여 국내 팀과 자주 경기를 갖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 야구 열기는 마산시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마산거주 일본인들도 팀을 만들었고, 또 조선인들도 미우(米友)라고 하는 팀을 만들어 일본인팀과 겨루던 사실에서 뜨거웠던 야구 열기를 본다.

위의 소년 야구대회도 그러한 지역 내외의 야구열기 속에 진행된 듯하다.

   

"마산체육회 주최로 지난 5월 26일 당지 구락부운동장(俱樂部運動場)에서 소년야구대회를 열었는데, 관객이 무려 수천에 달하였으며, 참가단체는 창신(昌信) 공보(公普) 두 학교의 각 두팀(제1, 제2)과 주일학교(主日學校), 사해(四海), 수원(壽元), 비룡(飛龍) 등 8개 단체였다. 추첨에 의하여 제1회 예선전을 행한 결과 상대 및 승리는 아래와 같다.

주일 대 수원 7대 6, 주일 승

창2 대 보2, 28대 7, 창2 승

창1 대 보1, 17대 2, 창1 승

사해 대 비룡, 10대 9, 사해 승

제1회 예선전은 이상과 같았는데 참패를 당한 보교생은 시간 전에 퇴장하고 제2회 예선전이 개전하자 폭우가 내렸으되 계속 개전하였는데, 결국 시간 관계로 연기되었다가 지난 5월 29일 오후 3시에 같은 장소에서 최후 결승전을 열었고, 창1 대 주일이 개전되어 최후의 승리는 창1군에 돌아갔다더라(마산)"

/옥가실(동아시아 역사 통신·http://blog.naver.com/yufe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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