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인 작가 …자살소동으로 시작되는 삶의 소중함에 관한 이야기

지금은 없어진 프로다. 손범수가 진행하기 전 아나운서의 모범이라는 이계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아프리카 주민들이 내지르는 듯한 시그널 음악과 목도리도마뱀이 목도리(?)를 펴고 우스꽝스럽게 달리던 장면을 기억하실는지. 이계진 아나운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가시고기'에 대해 내레이션 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릇 인간이든 동물이든 내리사랑이라 함은 모정(母情)을 뜻하지만 가시고기는 그 생김과 다른 진한 부정(父情)으로 시청자들을 울렸다.

얼마 전에 중고책방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 표지를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그 책 표지를 기억하는 이라면 노인네라는 우스개를 달았지만 책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추억에 젖었다. 여고 교실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던 친구를 확인하면 그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그 책의 독자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다.

매일 찾는 출판평론가 한기호 소장의 블로그에서 읽은 글이다.

   

"1990년대 이후 소설로 200만 부를 돌파한 것은 〈아버지〉(김정현), 〈가시고기〉(조창인),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등 세 가지이다. 21세기 들어 단권으로 밀리언셀러가 된 우리 소설로는 〈가시고기〉, 〈봉순이 언니〉(공지영), 〈아홉살 인생〉(위기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등이다."

<살아만 있어줘>는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이 새 소설을 냈다. 소설을 잘 안 읽는 탓도 있겠지만 제목부터 진부한 느낌이었고, 내용도 뻔하지 싶은 생각에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책상 한구석으로 밀어뒀다. 토요일 밤늦게 <고요함이 들려 주는 것들>의 첫 이야기 '인생, 얻기 힘든 소중한 기회'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다시 책을 펼쳤다. <살아만 있어줘>는 처음부터 자살 이야기였고, '인생, 얻기 힘든 소중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반된 내용이 이 책을 생각나게 했고 새벽 4시까지 한 달음에 다 읽었다.

다 읽고 나서도 조금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진부함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다. 나는 90년대 멜로(또는 연애) 소설과 영화를 즐겨 읽고 보았고 한때는 낭만주의자였(었)고, 남자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가난, 고아, 연인, 친구, 헌신, 사고, 이별, 재회 등등의 키워드로 그릴 수 있는 스토리는 뻔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가려져 있었다. 뒤늦게 드러나는 사건들은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어 감동이 배가된다.

△p21.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죽어 마땅한 이유도 있다. 정신이 괴로워 몸을 망가뜨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몸이 괴로워 정신을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정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가야 할 경우가 있다.

'살아만 있어줘'는 주인공 은재의 유언이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삶에 의욕을 상실했던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몇 개월을 지켜준 딸에게 그가 손바닥에 적어 준 유언이다. 처음부터 냉소적인 젊은 여자 둘의 자살소동으로 시작해 불편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늘어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세세한 줄거리는 생략한다. 읽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41. 비에 젖은 이에게 우산을 들려주기보다는 함께 비에 젖는다. 그러나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함께 기다려 줄 수 없다면, 함께 비를 맞았던 자체가 무의미하다. 젖은 옷을 함께 말릴 수 없다면, 섣불리 함께 젖는 일은 하지 말아야 옳다.

추석이나 설날 즈음, 특집극이라는 이름으로 길지도 않게 2부작 정도, 감동이 있는 드라마를 보여줄 때가 있다. 예고편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줄거리가 감이 온다. 그렇다고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가족이 TV에 둘러 앉아 눈시울 붉히면서 자리를 지킨다. 드라마가 끝나고 눈시울이 젖었다는 사실이 무안한지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 번 웃고 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그런 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p131. 세상이 살 만하다고 여기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스스로 바보가 되어 세상에 속아 넘어가거나, 용의주도하게 세상을 속이는 것. 그 외에는 세상의 끝자락이든 중심이든 삶은 고단할 뿐이다. 질질 끌려 다니다 속절없이 안녕하게 된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은재는 작가의 또 다른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흙장난(흙장난의 책 읽기·http://bloodlee.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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