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구 지하철 4번 출구 쪽,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벽 공간. 오다가다 그만 스쳐갈 수도 있을 사람들, 마치 설렘과 어수선함이 함께 먼지처럼 떠도는 대합실에서처럼. 기준 없이 뭉쳤다가 흩어지는 이들의 웅성웅성 소란 소리,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쌈'(부산 수영구 문화매개공간)의 수다꾼들.

그들은 마치 '페이스북'이라는 매체에서 군집과 해체를 반복하는 누리꾼들의 모습을 얼마간 닮아있다.

'쌈'과 '페이스 북'을 떠도는 배고픈 영혼들, 차라리 이들은 자발적으로 맺어지다가도 곧 산발적으로 흩어지는 한 무리의 '떼'다. 하나의 '조직'이나 강고한 규율에 꾸려지는 '집단'이 아닌, '떼'의 '웅성거림.'

내게 쌈과 페이스북은 그런 공교로운 존재다. 물론 수직적 계열이나 일정한 규칙이 없는 떼처럼 만나고 또 흩어지다 보니, 사람들 간의 관계나 그 웅성거림의 내용에 긴장이나 점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웅성거림이란, 또 '관계'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수직적이고도 엄숙한 말하기와 의무적인 관계 유지의 굴레는 우리의 여윈 어깨를 얼마나 또 무겁게 짓눌러왔나.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저절로 만나지면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관계, 그것이 진정한 말하기와 인간관계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늘 국사만 논하나. 우리들 자신이 소홀히 하고 소외했던 작은 일과 큰 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등의 미묘한 사연들, 사실 세상은 그렇게 얻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일상의 변화를 통해서 조금씩 달라져왔다.

또 쌈과 페이스북, 그 떼의 성원들 특징이 그러하듯, 그 웅성거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전혀 계통도 근본도 없다. 그저 누군가가 말 언저리를 툭 찔러 접속하면 그 말들의 의미는 다시 배치되고 확장되며 관계는 재정립된다.

그래서 기존의 관계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만난다. 나와 어느 한 측면으로 닫혔던 관계는 또 다른 새로운 누군가의 접속에 의해 다시 열리고 생성될 수도 있다. 과연 오늘 어느 한 면으로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일 또 다른 한 면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므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는 말을 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비록 한 번 더 말하고 한 번 더 실패한다 하더라도. 오직 내가 한 번 더 말하고, 당신이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천국은 따로 있지 않다, 곧 여기 비루한 땅 바로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사이)에게. 구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의 관계 속에. 그저 하염없이 말하고 또 반복해서 듣는 행위 그 자체로. 아무래도 세상은 영웅이, 제도가, 정치가 구원하는 것이 아닌 듯 싶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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