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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적인 평등·평화·통일운동 하겠다"

[피플파워-김주완이 만난 사람] 권영길 국회의원

김주완 기자 wan@idomin.com 입력 : 2011-11-21 15:19:50 월     노출 : 2011-11-21 15:19:50 월

지난 6월 22일 민주노동당의 유일한 지역구 재선 국회의원이자 진보정치의 맏형으로 불리는 권영길(70·창원을) 의원이 2012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진보 대통합에 몸을 던지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권 의원이 몸을 던져 성사시키려던 진보신당과 통합은 끝내 무산됐다. 이후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추진했던 국민참여당과 통합안은 권 의원이 앞장서 부결시켰다.

그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진보정당 최초로 3선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이루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어제 부산서 열린 5차 희망버스 다녀오셨지요? 사실 저도 4차까지는 다녀왔는데, 한 번 갔다 오면 다음날 하루 종일 뻗었거든요. 그런데 (권 의원님은) 오늘도 하루 종일 지역구 인사하러 다니셨죠? 체력적으로 괜찮나요?

“나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놀아야 하는 것 같애. 현장에서 뛰면 힘이 솟는 것 같고, 의기소침하거나 할 때도 현장에서 그렇게 뛰어야 극복도 되고….”

-특별한 체력 관리 비결이 있나요?

   
 
  권영길 국회의원. /박일호 기자  

“타고난 체력이라고 그러던데…, 전에는 그냥 보람되게 살고, 낙관적 견해를 갖고 살아가는 게 건강의 비결이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만들 때도 1년 중 밖에서 살아야 하는 날이 300일 이상이었고, 그렇게 밖에서 농성하고 노숙하고 찬바람 맞고 쫓겨 다니고 하는 날이 거의 전부였는데도 육체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내가 지리산 밑에 살았으니까 어머니가 도라지인줄 알고 먹였는데 아마 그게 산삼 아니었을까 하는 농담도 하지.(웃음)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늘도 지역구 돌아다니셨죠?

“오늘 진짜 많이 다녔지, 마라톤대회도 가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러 지역행사도 가고, 정병산 숲속 나들이길도 두 시간 돌고…. 2000년부터 늘 고정적으로 가는 곳이 있거든, 정병산 가고, 성원 토월동 아파트단지에 있는 목욕탕에 고정적으로 가는데, 보통 정치인들은 목욕탕을 바꿔가며 다닌다는데 나는 그렇게 하는 게 인위적인 것 같아서 중앙탕 한 곳에만 가지. 정병산 가면 내 건강을 위해서도 좋고, 창원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에….

-불출마 선언을 하시면 지역구 관리에 소홀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계속 이렇게 지역구를 챙기는 이유가 있나요?

“내년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지만, 국회의원 임기는 내년 5월 말까지니까. 그 때도 이야기했지만 이전보다 더 열심히 창원을 위해서 일하겠다, 더 많이 만나고 더 열심히 뛰고 창원을 위한 활동도 더 폭넓게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을 했지. 그게 내 본분이고, 진보정당, 진보정치인은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진보정치라는 것은 국회의원으로 있든 아니든 모든 당원들은 일상적으로 서민들과 함께 해야지. 비록 의원직은 그만두더라도 진보정당을 만들 때의 생각처럼, 노동운동을 할 때처럼 같은 마음으로 뛰어야 한다고 봐.”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때 산청으로 오셨고, 부산서 중고등학교를 다니셨고, 그 후 서울에 계시다가 2000년 창원에 오셔서 한 번 낙선 후, 2004년 당선되어 지금까지 왔는데, 의원님께 창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창원시민들께 마지막으로 드려야 할 인사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 정기국회 끝나고 나면 사실상 19대 국회는 마감되는 거거든. 17대 때는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그 다음에 본회의가 열려 한나라당 창녕·밀양 김용갑 의원이 의원직을 청산하는 신상발언도 하고 그랬는데, 저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어. 만일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회의원직을 마감하면서 창원시민에게 드리는 인사말도 하고 싶어요.

창원은 한국 진보정치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2004년 당선됐을 때 창원시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씀 드렸는데, 선거과정에서 다 밝혀졌지만, 대선 때도 나왔고, 2000년, 2004년에도 나온 말이 첫째로 권영길은 빨갱이다. 빨치산의 아들이다. 권영길은 폭력집단의 총수였다 하면서 민주노총을 과격폭력집단으로 매도를 했어요. 그것을 창원시민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거죠. 창원시민이 색깔론 청산을 해준 겁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매도, 폄하, 비난을 완전히 표로써 정리해준 곳이 창원입니다. 창원은 정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곳입니다. 선거 때면 서울 종로, 요즘은 강남을 정치 1번지라고 그러는데, 제가 생각할 때 한국에서 창원이야말로 가장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가진 곳이다, 창원은 한국정치를 만들어내는 샘터이고 한국정치의 희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중인 권영길 국회의원. /박일호 기자  

-그런 창원에서 내년에 또 나와도 무난히 되리라고 보는 사람도 많은데, 백의종군 결심을 하실 때 가장 큰 고민은 뭐였나요?

“현실적 고민은, 창원을 진보정치의 1번지로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끊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죠. 진보정치 1번지뿐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이 창원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현실적 고민이었지.”

-그것 때문에 지금도 (권 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창원은 그렇게 됐지만, 다른 지역에서 나오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국회의원으로서 3선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명예롭지만, 3선의 힘을 갖고 더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당에서 (불출마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진보정당에서 진보정치인이 3선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회 안에서 상임위원장이라든지 중요한 직책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년에 야당의 승리를 목표로 잡고 그것이 이뤄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보정당에서 통합도 중요하지만 뭔가 한 축을 이뤄야 할 것 아니냐, 그게 어쩌면 더 중요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더 큰 것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다. 대통합이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진보통합은 무산된 게 아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진보통합은 무산되었지 않습니까? 그게 무산된 상태에서 불출마 선언도 원인무효가 되는 건 아닌가요?

“우선 진보통합이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설사 무산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되돌릴 수는 없죠. 그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니까. 통합이 되든 되지 않든 다른 역할, 백의종군 하겠다.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산 쪽에서 진보신당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 동지가 저에게 강력히 (부산 출마를) 요청하면서 진보통합이 어렵게 된 것 아니냐, 부산·울산·경남이 내년에 매우 중요하다. 창원시민들도 이해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나는 안 맞는다고 본 것이고요.

그리고 진보통합이 무산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진보신당 당 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이 부결됐지만 진보신당에서 통합을 주장하던 분들이 통합연대를 만들어서 다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하자는 거거든요.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대표, 이른바 노심조 그런 분들이라든지, 저도 그런 완전한 복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통합을 해야겠다, 진보의 합창도 결합하고 진보학계도 함께 해서 준정치조직체, 준정당을 만들자, 정당으로 내걸면 제일 좋은 거고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정당과 다름없는 새로운 진보정당 통합추진위원회, 새통추가 그 역할을 하고 노동자대회 전에는 통합진보정당을 발족시키자는 거거든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올해 노동자대회가 전태일 열사 기일 전후거든요. 아마 내 기억으론 딱 그날 11월 13일이 될 거예요. 그날이 기일이고 노동자대횐데, 그 전에는 통합진보정당을 발족시키자는 겁니다.”

   
 
  권영길 국회의원. /박일호 기자  

-그렇게 되는 데 대해선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거부감이 없을까요?

“뭐, 약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좀 있을 겁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열렬하게 박수치면서 맞이하지는 않을 거라고 보지만, 그렇더라도 통합해야 하는 겁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 논의 때 의원님이 가장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피력했고, 그게 부결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는데, 국민참여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까?

“우선 국민 다수가 진보정당이라고 안 보거든요. 어떤 분들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국민다수가 실제적으로 진보정당이라고 안 본다는 겁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못 알려진 게 있는데, 당 대회 때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만, 참여정부 때의 운신, 김주익 위원장처럼 숨진 분들, 농민 두 분은 경찰에 맞아죽기도 했습니다.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통합을 반대한 것처럼 알려졌고, 유시민 대표도 그렇게 이야기했던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잊을 수 없어서 국민참여당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한 첫 번째 이유는 노동 없는 진보정치는 없다, 진보정치의 생명은 노동이다, 그러나 국민참여당과 통합하면 진보신당은 배제되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는 민주노총의 분열이 온다는 겁니다. 민주노총의 분열은 노동운동의 와해로 이어진다는 거죠.”

-그게 핵심인 거네요?

“그전에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민주노총이 보수언론과 정권으로부터 매도당하고 공격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 민주노총은 한국 사회발전의 중심체입니다. 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개별적 개체를 노동자로 하지 않습니다. 조직된 노동자가 노동자인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직된 노동자의 중심체는 여전히 민주노총인데, 이 민주노총을 바로세우고, 바로 선 민주노총이 제대로 걸어가야 한다, 바로 선 민주노총이 사회개혁의, 민주화의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민주노총이 깨진다는 것은 노동 없는 진보정치고, 한국사회의 붕괴와도 같은 것이다, 왜 민주노총이 분열되냐면, 지금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하면 이 배타적 지지가 유지가 될 수 없습니다. 배타적 지지가 없어진다는 것은 바로 분열이죠. 지금도 민주노총에는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많고, 위원장 선거에서 그걸 공약으로 내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배타적 지지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 지금대로 이야기하면 민주노동당 노조, 진보신당 노조, 사회당 노조,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우파정당 노조도 있는 거죠. 한나라당 노조. 그러면 바로 이건 와해되는 거죠. 프랑스의 경우 뭐 사회당 노조, 공산당 노조, 급진파 노조 있고, 우파 노조도 있는데, 그런데 왜 거기는 노조가 유지되고, 진보정당이 집권까지 할 수 있느냐면 결선투표제가 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노동조합들이 연대투쟁도 하고 있고, 선거 때 각자의 공약들을 내걸고 노동조합도 그걸 갖고 목소리를 내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분열로 안가고 보완적으로 역할을 합니다. 얼마 전 프랑스 상원에서도 결선투표 때는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 다 경선하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를 못하면 1,2위 결선투표를 하는데, 좌파 우파로 나뉘어 좌파는 좌파끼리 연대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분열이 안 되고 연대가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도 없고, 결선투표제도 없죠.

설명이 좀 길어지고 있는데, 제가 진보통합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노동현장에서 요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열되니 현장이 분열되고, 아무 것도 안 되고 있다는 거죠. 나는 현장 통합을 통해 정치 통합을 하자는 쪽이었는데, 정치통합이 먼저 되어야 현장 통합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창원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향후 통합정당에서 어떠한 당직과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다는 말입니까?

“진보정당, 진보정치에 있어서는 국회의원직을 갖고 있거나 갖고 있지 않거나 계속 진보정치는 하는 것입니다. 그만두면 나는 ‘평평통 운동’으로 가려고 합니다. 평등 평화 통일, 평등 하면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으로 볼 것 같은데, 아주 구체화시키려고 그러거든요. 민주노동당 창당 때 내걸었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이 슬로건이 구체화되지 않았습니다. 8년 간 의정생활 하면서 보니까 국회의원이 아닌 정치인이 정말로 바닥으로 들어가서 일종의 범국민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습니다.

무상의료라 한다면 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것 다 하자, 1만원 더 내면 건강보험 하나 갖고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국민들 안 받아들일 사람 없다고 봅니다. 요즘 영리병원 논란과 생각해봐도 아주 중요한 일이죠. 또 교육도 막연히 등록금 문제로 되어있는데, 무상교육이라는 것은 학벌 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고, 학벌 없는 사회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이뤄지는 것을 말하는 총체적인 것입니다. 또 평화운동이 통일운동이고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이죠. 한반도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 평화체제를 만드는 그런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진보통합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상당히 마음이 무거울 텐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그 전에 진보통합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야겠는데, 그런 이야길 했습니다. 2009년 9월부터 진보통합을 외쳤는데, 그 때 그냥 막연하게 진보통합이라고 하지 말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라고 말하자. 그래야 핵심적 사안이 부각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통합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 이후 진보대통합,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또는 통합진보정당 이런 용어를 썼거든요. 그 때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이 두 당이 통합되지 않으면 어떤 진보통합도 없다. 이 두 당이 통합된 후 서로 동의가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도로 민주노동당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자. 형태가 민주노동당이 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실패한 것이냐?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잘못했다. 뭘 잘못했나.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를 내세웠는데 그걸 구체화시키지 못했다. 세밀한 구체적 정책을 갖고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고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고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에 안겨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그런 잘못은 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도로 민주노동당? 교훈을 얻어야 한다. 만일 분당이 안됐다면 2008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가 되었거나 그 비슷하게 갔다. 그것은 거의 정치전문가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 파탄시키고 서민경제 죽이고 남북관계 파탄시키고 이렇게는 안됐을 겁니다. 뭔가 바뀌었을 겁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민중들에게 절망을 안겼죠. 노동자들을 배신한 겁니다. 희망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두 당의 통합은 첫 번째로 속죄다. 그 때에 몸담았던 모든 사람은 정말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여러분께 절망을 안겼습니다. 우리가 죽일 놈입니다. 정말로 이제 잘하겠습니다 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 잘하는 게 뭐냐? 통합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정책을 구체화시켰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속죄를 안 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지금 이제 보편적 복지가 나오고 있는데, 이 보편적 복지의 주체가 누구냐, 바로 진보정당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보편적 복지는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야당이 승리할 수 있고 정권교체도 되리라고 보는데, 그 상황에 가서도 진보정당의 복지와 아닌 쪽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보편적 복지는 재원 없이, 증세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우리가 내걸었던 부유세입니다.

부유세는 상징적 용어거든요. 그게 길게 보면 노동자의 착취를 막아내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거둬야 하느냐, 우리나라에선 1~5%의 그 범위 내에서 거둬야 합니다. 지금 뉴욕 월가에서 1%를 위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복지는 1~5%에게서 세금 더 거두는 겁니다. 무상급식이 부자에게 공짜 밥 주는 것이냐, 아니다, 세금 더 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보정당이 앞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통합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통합이 되어야 야권승리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가장 힘든 때는 97년 대선 직후와 민주노동당 분당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특별히 제일 힘들었을 때는 솔직히 97년 대선 끝났을 때였고, 가장 힘들었을 때는 분당 때였죠. 이번에 통합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지나온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었어야 할 때 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두 대목이 있는데, 민주노동당에서 당직 공직 겸직금지 규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죠.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 전에는 그것 때문에 진보정당 발전이 가로막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그래서 나에게 강한 목소리를 좀 내라는 말이 많았는데, 그런데 내가 한 마디도 못했거든. 왜냐면 그 조항을 푸는 것은 마치 권영길이 대표를 더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아서. 그래서 나에게 요청하는 동지들의 견해에 그럴 것 같다고 동의하면서도 일체 말을 하지 않았어죠. 그 뒤에도 동지들이 그 때 이야기했으면 민주노동당이 또 다른 모습을 보였을 텐데 하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게 패착이었다는 것은 그것을 주장했던 분들도 다 동의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대선 때인데, 패배하고 비대위 구성하고, 그 때에 제일 괴로웠던 것은 아! 분당되면 끝인데, 안 되는데, 정말 내가 분당을 막는 눈물어린 호소를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 때 말을 못했습니다.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분당의 결과가 너무 아팠습니. 그게 가장 아픈 대목이죠.”

-분당 때는 왜 적극적인 목소리를 안 냈습니까?

“그게 좀 자격지심 뭐 이런 것 같았어. 사실 진보정치인이 그러면 안 되는데, 대선 패배 직후였으니까 거기에….”

-97년 대선 끝났을 때는 왜 그렇게 힘들었나요?

“그 땐 국민승리21이라는 가설정당, 선거용 정당이었는데, 그럼에도 일제 때 신간회 이후에 모든 진보정치조직과 진보인사들이 결합된 것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정말로 그게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출발이었죠. 그런데 선거 끝나고 나서 뿔뿔이 다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남은 사람이 그 때 거의 뭐. 마포에 선거사무실이 있었는데, 중앙선대본만 해도 200명 내지 300명이 들끓고 그랬는데, 개표 진행되는 그날 밤 12시쯤 초상집처럼 되어버렸죠. 나는 그 건너에 숙소 호텔에 있었는데 아침에 갔더니 폐허처럼 되어 있더라고. 서너 명은 울고 있고…, 그래서 그거 며칠간 추스르고….”

-그게 기대수준이 각각 달라서 그랬던 걸까요?

“그 때 70여 만 표 기대를 했는데, 30여 만 표 정도 나와서…, 한국 진보정당은 이제 희망이 없다, 그 때 선대본에 간부 맡고 있다가 나가서 민주당에 의원이 된 사람도 있고, 핵심 요직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죠. 만나면 쑥스러워하고 그러기도 하지.”

-그런데 그 때 사실 겉으론 국민승리 운동하고, 속으론 민주당 운동한 사람도 있다는 얘기들이 있었죠.

“제 입으로 이야기하긴 뭐하지만, 그 때 그런 게 많이 있었죠. 그 때 끝나고 나서도 가슴이 정말 아팠던 것은 민주노총을 만들면서 정말로 어떤 동지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민주노총 건설에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라고 뛰었던, 그 사람들 몇몇이 권영길의 대선출마는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온 것이다. 어느 2중대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가 들렸고, 그 후에도 그랬다고 하는데, 그런 대목도 가슴 아팠던 대목이고…, 그 때도 그랬고 2002년에도 권영길의 출마, 진보정당의 출마가 김대중의 당선, 노무현의 당선에 오히려 보탬이 됐으면 됐지…. 그 때 김대중 후보는 완전히 좌경용공, 정말 급진적 후보로 몰렸었는데, 더 좌쪽에 있는 후보가 나오니까, 모든 공약도 비교가 안 됐었고, 2002년에도 그랬어. 돌아가셨기는 했지만, 노무현 후보와도 텔레비전 토론 끝나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 서로 이해가 많이 되고….”

96년 총파업, 벅찬 기억

-언론노련 창립, 업종회의 창립, 전노대 창립, 민주노총 창립,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창당, 국회의원 당선 이렇게 쭉 살아오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벅찼던 순간이 있다면.

   
 
  권영길 국회의원. /박일호 기자  

“민주노총 때 전국적인 총파업이죠. 그 후 대선 나올 때도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기자, 특파원, 언론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진보정당 대선 후보 이렇게 걸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기자 하다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될 생각을 했냐, 어떡하다가 진보정당 대선후보가 됐냐. 내 답변은 그 때와 지금이나 똑 같은 길이다. 기자 할 때와 연속선상에 있다. 내가 기자를 한 목적은, 고등학교 다닐 때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 농대를 갈까 사회과학 쪽을 갈까 하다가 농대를 갔고, 그 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농민운동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그게 기자다, 기자 활동을 하면서 이 나라의 사회 개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안됐다. 그래서 언론민주화를 통해 사회민주화를 이뤄내고, 사회민주화를 통해 이 땅의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길을 걸어가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죠.

민주노총이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적인 정치 총파업을 한 번 하는 게 바로 이 나라 사회개혁운동의 출발점이고 제대로 된 노동운동이 서는 것이다. 그걸 위해 민주노총 위원장 때 모든 것을 바쳤어. 고개 숙여야 할 땐 고개 숙이고, 감출 것은 감추고, 그런데 드디어 1996년 12월 25일 밤을 새고 26일 아침이 되었을 때 위원장으로서 명동성당에서 총파업을 선언했었고, 그게 97년 2월까지 이어졌지.

조금 더 배경설명을 드리자면 그 때 신한국당,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었고, 노동법을 어떻게든 통과시킨다는 정보를 청와대 핵심인사로부터 듣고 있었어. 그 때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줬지. 12월 25일 밤에 강행처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중에 날이 새기 전에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날이 샐 무렵에 언론사에 급히 연락하여 발표한 거죠.”

-찬반투표는 미리 해둔 상태였나요?

“그 전에 사실은 10월 13일일거야, 노동법 개악 움직임이 쭉 있었기 때문에 미리 찬반투표를 거치고 위원장에게 일임되어 있었지. 10월 13일에 왜 파업 안하느냐며 내가 엄청나게 공격도 받고 했어. 그 후에도 또 왜 안하느냐며 공격받은 때도 있었지. 이건 비사인데, 김영삼 정권의 아주 핵심인사 한 사람이 나에게 찾아와서 오히려 파업에 들어갈 것을 종용을 했어요. 파업 들어가면 권영길 위원장은 최초로 전국적 파업 선언한 위원장 되고 영웅 되는 것 아니냐고 했어. 그거 뭐겠어요? 파업 들어가면 당연히 구속되고, 그리고 끝나고 노동법을 강행통과시킨다는 계산을 갖고 있었던 거지. 그걸 내가 읽고 있었거든? 아니다 결정적 시기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그게 12월 26일 아침이었던 거야.”

-일임되어 있다 하더라도 막상 결단을 내리려면 두려움이 많았을텐데.

“실질적으로 위임 되어 있다 하더라도 명동성당에서 그냥 선언하는 거잖아요. 민주노총은 12월 26일 08시부로 총파업에 돌입한다 딱 이 선언인데, 안 따르면, 어디든 안 일어나면 정말로 이건 뭐 끝이잖아. 그 순간이 정말로 일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을 거야. 선언하고 이렇게 딱 있는데, 제일 먼저 기아자동차에서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좀 있으니 울산에서도 움직인다 들어오고, 마침내 서울 쪽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성공했구나.”

-그 때 총파업 규모가 어마어마했죠. 이십 몇 만 명이….

“그랬지. 연인원으로 치면 굉장했고. 그런데, 노동조합이 왜 정치파업하느냐, 노동법 그게 아무리 악법이라 하더라도 그게 어떻게 파업 대상이냐 하는데, 노동조합은 그 나라가 민주화가 안 되면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야 하는 게 노동조합이고, 인권이 안 되면 인권신장에 앞장서야 하는 게 노동조합이야. 이건 ILO 헌장에도 포함되어 있어.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심지어 80년대 중반인가 할 땐데, 프랑스가 핵실험을 태평양권에서 할 때 핵실험을 반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결의하고, 남미에선 토지개혁을 위해서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결의했어. 오늘날 뉴욕 월가에서도 그렇잖아. 월가를 점령하라 부자들의 탐욕을 규탄하기 위해, 바로 그게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이지. 하물며 노동법은 노동자에게 바로 직결되는 문제인데, 어쨌든 그 때가 제일 보람된 것이었고, 그걸 기다리는 것이 가장 긴 시간이었죠.”

-88년 귀국하고 바로 언론노동운동 뛰어들었는데, 그 때 사모님은 만류하지 않았나요?

“그 이전에 나하고 결혼하고서부터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는 입장이었지. 프랑스 갈 때 처음엔 기자를 그만두고 공부하러 간 거였는데, 기자를 하면서 몇 년간 너무 괴로워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 때 전체 언론이 유신치하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홍보지였지만, 서울신문은 실질적으로 정부기관지였으니 거기 몸담고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모습 보고, 나에게 동의했었고, 가서 다시 기자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고,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부인은 몰락한 재벌의 딸

-사모님도 사회의식이 좀 있었나요?

“알려진대로 나와 결혼할 무렵에는 망하긴 했지만 지금으로 보면 재벌집 무남독녀고,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 그룹의 외동딸이었으니까 뭐 사회의식 같은 건 없었다고 봐야지.”

-그런 외동딸을 어떻게 꼬셨나요.(웃음)

“내 친구하고 내 외종, 내 친구가 집사람에게는 외사촌 오빠고, 내 친구에겐 집사람이 고종사촌 동생이고, 친구 덕분에 만나게 됐지. 그렇게 같이 만나 어울리면서….”

-어떻게 꼬셨냐고요.(웃음)

“허허. 뭐 자연스럽게 서로 간에 어느 순간 마음이 통했겠죠. 처음엔 망한 재벌집 무남독녀이긴 했지만, 별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 날 그렇지 않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고, 오빠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고, 저를 만나면서 또….”

-이미 가세가 기울어졌을 때인가요?

“동방생명은 그 때 삼성에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내가 결혼할 땐 장인어른은 안 계실 때였고, 재판도 진행되고 했는데, 나중엔 망했다고 해서 먹고 살게 없을 정도는 아니었고….”

-처가 덕은 좀 보신 건가요?

“어쨌든 당시 기자 월급으론 생활도 안됐는데, 생활에 보탬이 된 거죠.”

-(오래 된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제가 91년인가 찍은 사진인데요. 지리산 등반하고 내려와서 찍은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사진입니다. 당시 화이트칼라 노조와 블루칼라 노조가 쉽게 통합이 안 될 때였는데, 이 때 이 만남이 민주노총 건설의 계기가 된 게 맞나요?

“아! 이게 누가 찍은 건지 몰랐는데 김 국장이 찍은 것이구만. 민주노총을 만드는 결정적 계기로 기억하고 있지. 지리산 거림골에 2박3일 있다가, 3박이었는가? 내려왔을 때인데, 그게 92년이나 아마 그렇게 되었는데, 왜 들어갔냐면 업종회의 의장, 단병호 위원장, 업종회의와 전노협간의 화학적 결합도 필요하고,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란도 있었고 진전이 잘 안 될 때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디 가서 그냥 하여튼 며칠 어떤 주제를 갖고 딱딱하게 토론하지 말고 가서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해보자. 그 때 20~30명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민주노총의 밑그림이 그려졌죠. 그러고 나서 이 사진이 진주 명석면인가 그런데, 이게 역사적 사진이라고 다들 그러는데….”

-자녀는 어떻게.

“딸, 아들, 아들인데, 막내는 나이가 마흔에 접어들었는데 결혼도 못하고 비정규직 직장 갖고 있다가 나오고, 있다가 나오고 지금 하여튼….

-큰 아들과 딸은 결혼했고요?

“했지.”

-아직도 인터넷에 보면 자녀가 미국유학 갔다는 비난글이 간혹 있는데.

“결혼해가지고 딸 내외가 유학 갔다 왔죠.

-아, 결혼하고 난 뒤에?

“그렇게 하여 사위 되는 집도 춘천에서 지금은 동네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 하고 있으니까 어렵고, 나도 보태 줄 형편은 못되고, 그래서 자기들이 알아서 장학금 받아 그렇게 간 거지.”

-빨치산으로 돌아가셨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 아버지에 대해서는 산청군 운리, 구름운자에 운리, 남사예담촌이라고 거기 지나서 본적지는 입석리라는 곳인데, 입석국민학교라고 있었지. 입석이라서 선들, 선돌이라고 고향에선 부르는데, 그 학교를 만드는데 아버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 때 내가 학교 들어갈 나이가 안 찼을 땐데 아버지 손 잡고 학교 입학하는 날 간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지.”

-195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집에서 장례를 치렀나요?

“전쟁 일어나고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서 이리 저리 돌아다닐 때 부산에 있는 작은아버지가 나를 데려가서 공부를 시켰는데, 어느 날 겨울방학 때 와서 보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지. 장례도 못치르고, 그냥 길거리에 가매장 비슷하게 되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에 세월이 좀 지나고 난 뒤 정식으로 이장해서 묘소를 만든 거지. 어머니는 지금 92세신데 살아계시고.”

-우리나라 빨치산이 한국역사에서 보면 남쪽은 물론이고 북한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 다만 나에게 영향을 끼친 분이 아버진데, 부산에서 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두 차례 고향에 갔었지. 그 때까지만 해도 차가 다니지도 않고, 진양군 명석면 오미리 산을 넘으면 성철스님 생가 묵곡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또 산을 넘어 집까지 갔는데, 그 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어. 어른들이 어디 가느냐, 어디 사느냐, 누구집이냐 물어서 답하면 거의 예외 없이 그러냐? 너희 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분이었다고 말해주었어.”

-다시 현실 정치로 돌아와서, 사실 백의종군 선언 후 포스트 권영길이 제일 관심사이자 과제이기도 한데, 특정해서 말하진 못하겠지만 어떤 사람이 좋겠다 자격기준이라든지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개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할 순 없는 거고, 후보발굴위원회가 구성이 됐기 때문에 거기서 만들어야겠지. 거기서 나에게 회의진행이라든지 좌장을 맡아달라든지 요청이 있으면 하겠지만, 내가 직접 어떤 후보라고 이야기할 순 없고….

누가 되든지 간에 이길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국정감사도 끝났으니까 창원 을에서 더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면서 진보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많이 하려고 합니다. 누가 나오든 이길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놓고 싶습니다.”

-진보정치 어른으로서, 또 노동운동 선배로서 우리나라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한 마디 하신다면?

“민주노총은 정파주의를 버려야 합니다다. 또한 세계 어느 나라든지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관료주의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죠. 결국 관료주의, 부패 이게 사회주의를 붕괴시킨 중요한 요소라고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에서도 정파주의와 관료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하자면, 뭐가 유연하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실행하는 방법이 유연해야 한다는 건데, 그 원칙을 바꾸는 것을 유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이상을 결국 빼버렸는데, 과연 사회주의를 버리는 것이 유연한 것인가? 사회주의라는 게 완전히 배척당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주의 때문에 진보정당이 집권하지 못하는 것인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걸 때려 엎는 게 아니거든,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는 거지. 특히 한국사회에 있어서는 이걸 뛰어넘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야? 그런데 민주노동당에서 완전히 빼버린 거거든? 진보정당의 뼈대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뉴욕 월가에서 사람들이 지금 뭘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거지. 잘못됐다면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 표현으로 구성되는 것이 정당에선 강령이고 정강인데….”

-노동운동에서 관료주의 정파주의 버려야 한다 했는데, 보수언론에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이라고 비판한다.

“그건 노동운동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물론 민주노총은 스스로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므로 한계가 있어. 그럴 수밖에 없어. 네 밥그룻 반을 비정규직에게 줘라 하면 그건 안 되는 거거든? 말로는 외쳐도 안되는 거거든?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노동운동을 안 해서 문제야. 실제로 선거 때 표를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그게 안 되거든. 그 정당을 통해서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야 해.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는 국가의 재정적 문제로 일단은 풀어야 하고, 그 다음에 노동자가 중심이 된 사회, 구호로는 비정규직 외치지만 실제적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거거든. 조중동이 (노동운동을) 공격하면서 미국을 배우자고 하지만 미국노총은 선거 때가 되면 제일 먼저 민주당에 선거자금을 모아주는 곳이야. 그 이상 넘어서는 정치적 조직체가 없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진보정당, 좌파정당의 중심이 아닌 곳이 없어. 일본도 마찬가지야.”

-고맙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권영길 국회의원. /박일호 기자  

“첫머리에 이야기하려 했는데, 조중동 방송 때문에 경남도민일보가 어려워질 것 같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국민들이 미디어렙법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반대를 하는 것도 어려운 데 법을 만들어달라는 투쟁이 얼마나 어렵겠나. 한나라당 다수인데, 법을 안 만들려는 사람을 끌어와서 만들어달라는 투쟁이 얼마나 어렵겠나. 방송이 한 나라를 얼마나 파괴시키는지 나는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프랑스에서 특파원하고 있을 때 86년 우파가 집권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게 방송을 민영화시킨 것이었어요. 그 때도 민간 사영방송을 만들면 프랑스 문화가 무너질 거라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 그 때 한편에선 가장 지적 수준이 높은 프랑스 국민이 방송하나 바뀐다고 해서 그렇게 안 된다고 반박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나. 그렇게 방송이 바뀌고 나서 프랑스 문화를 완전히 할리우드 문화가 지배하게 되어버렸지 않나. 방송이 이렇게 되면 언론황폐화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성 붕괴도 뻔합니다. 그 와중에 종이신문은 얼마나 어렵겠나. 잘 뚫고 나가기를 빕니다.”

권영길 의원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인터뷰를 정리하고 보니 200자 원고지 100매가 넘었다. 어쩔 수 없이 절반을 줄였다. 그래서 권 의원에게 직접 글을 좀 써보라고 권했다. 글쟁이로 출발한 그였지만, 아쉽게도 그는 저서가 아직 없다.

권 의원은 요즘 아이폰3GS로 트위터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 듯 했다. 팔로워 수도 2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휘발성이 강한 트위터보다는 블로그를 통해 한국 노동운동의 지도자이자 진보정치의 맏형으로서 경험과 생각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걸 묶어서 책도 좀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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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 김주완 기자
  •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간 <피플파워> 간행과 각종 출판사업,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 업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