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던 시절 7남매 키우려 장날에 가마솥 걸고 장사힘겹게 사는 딸·손자로 3대째 이어져 명성·부 얻어
2남5녀 칠 남매를 거느리고 사는 윤분조 할머니(1대·사망)로서는 남의 전답 소작이나 품을 팔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남읍 수산 5일장에 나가 인절미, 국수, 묵을 팔게 되었다.
가난이 만들어 낸 3대 맛집
인절미, 국수, 묵을 팔지만 이문을 남겨 생계를 꾸려 가기란 여간 쉽지 않아 생각해 낸 것이 시장에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이게 되었다.
수산장이 서기 이삼일 전 삽과 양철 동이를 가지고 논배미마다 뒤져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잡아 모아 뒀다가 장이 서면 미꾸라지를 푹 고아 얼기미(어레미의 방언, 바닥의 구멍이 굵은 체)에 으깨며 걸러 풋배추, 토란대, 부추 등을 넣고 끓이다가 파, 마늘, 고추, 방아잎, 산초를 넣어 한 솥을 끓여내면 시골 곳곳에서 농작물을 이고 지고 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추어탕만 한 요깃거리는 없다.
우선 논바닥을 뒤져 잡은 미꾸라지나 풋배추는 농촌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이므로 사실 추어탕 장사로는 파는 대로 남는 것이며, 사먹는 사람은 이보다 더 싸고 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실속 있는 요깃거리는 없다.
매 5일장 인절미를 팔던 윤분조 할머니는 떡 장사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추어탕 장사가 본업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거래로 재미를 본 장사꾼들은 인절미와 추어탕을 동시에 시켜 속을 든든하게 하고 길을 떠날 수 있어 장꾼들에게는 윤분조 할머니가 하는 추어탕은 수산장 별미 중의 별미였다.
정기화 할머니 역시 친정어머니를 따라 추어탕 장사를 하지만, 사실 시골에서 가진 것 없이 자식들 키우며 사는데, 어머니한테 배운 추어탕 끓여 파는 재주밖에 물려받은 게 없으니…. 비록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장터는 아니지만 구 수산교를 건너 부곡으로 가는 길목 도롯가에 있는 친정집에 무쇠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여 팔기 시작했다.
사실 윤분조 할머니와 정기화 할머니 모녀의 추어탕 대물림은 가난의 대물림이었다. 그러나 이 가난의 대물림이 3대에 이른 오늘날에는 지긋지긋하던 가난을 극복하게 한 고마운 가업이 되었다.
정기화 할머니의 아들은 대형 슈퍼에서 비교적 안정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96년 IMF사태는 정기화 할머니의 아들 김기업 씨가 정든 직장을 떠나게 했다. 실의에 빠진 김기업 씨는 이곳저곳에 직장을 알아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고, 할 수 없이 정기화 할머니는 며느리 노하순(3대·44세) 씨를 데리고 추어탕 장사를 했다.
사명당의 입에서 나와 미꾸라지가 중텍이 된 것처럼 3대 맛집의 노하순 사장은 미꾸라지가 부(富)를 가져다준 것이다.
하루에 5말 들이 가마솥 3솥을 끓여내는 밀양 하남의 3대 가마솥 추어탕 집은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IMF로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3대 김기업·노하순 부부에게 희망을 안겨준 가업이 되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추어탕 맛이 있다는 것이다. 경상도 추어탕 특유의 풋배추 맛이 혀끝에 닿는 깔끔한 맛과 미꾸라지 알갱이에 어우러진 진득한 맛이 있다. 여기에 방아향과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더해지고, 경상도 사람들은 추어탕을 먹으며 이런 맛을 즐긴다.
"일이 고되지 않으냐?"라는 물음에 며느리 노하순 사장은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물론 힘들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자신들에게는 IMF가 계기가 되어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3대 대물림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가업에 대해 고마움을 알고 고객에게 감사하게 돌려주는 마음이야말로 고생이 뭔지를 경험한 사람만이 갖는 값진 자산이다.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691-4. 055-391-5932, 010-9889-7830.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김영복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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