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곳이 없어서 배회하는 사람들, 자기의 이익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정치인들, 시장경제를 살린다며 고가 외제품을 사들이는 여인들, 물 좋은 술집만 골라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국적,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남이야 다 죽더라도 나만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된다.",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따위의 것은 사람팔자다. 못 사는 사람들 때문에 나까지 억제하며 살아갈 수 없다.", 심지어는 "내가 오늘날 이렇게 비참해진 것은 모두 사회가 잘못된 탓이다. 난 열심히 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힘 있는 사람들이 다 망쳐 놓은 것이다. 정말 억울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창조설과 존재설, 그리고 생성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편협된 사고에 이끌려 이기적인 행동, 무책임한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런 과도한 생각이나 무절제한 행동들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 곧 존재론이다. 오늘날의 존재론은 크게 창조설, 존재설, 생성설(生成說)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창조설이란,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구약성서의 이른바 창세기가 그 대표적인 주장이다. 둘째, 존재설은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존재론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연을 논하고 그 자연을 설명하는 원리를 찾고자 노력한 끝에 자료, 곧 존재를 구성하는 원 물질인 원소를 발견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을 이룩한 기초가 되었다. 셋째, 생성설은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붓다(Buddha) 세존이 보리수 아래서 사색한 끝에 깨달은 연기론이 바로 이 생성론이다.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기는 것이며,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이론이다.

이 존재론을 주창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유명한 명구를 남긴 헤라클레이토스다. 이 존재론이 주장하는 자연의 원리는 당연히 그 존재에 작용하는 원동력 또는 법칙이 있게 마련이다. 이미 세존은 3000년 전에 사색과 분석을 통해 이 생성의 법칙을 구명(究明)하고 정각(正覺)인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존재 법칙인 연기법(緣起法)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간(世間)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공간적·시간적인 차별성을 느끼지 못할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교통·통신기술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의 동시다발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주선이 달을 왕복하고 우주공간에서 두 우주선이 도킹하고, 화성을 지구화하려는 시도와 함께 무한하게 생각하던 우주도 이제는 우리의 시각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세'는 변화·유전하는 것, 곧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를 뜻한다. 바로 시간적인 세계관이다. '계'는 공간적인 세계관이다. 곧 동·서·남·북·상·하의 공간적인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를 뜻한다. 이처럼 시간적인 '세'와 공간적인 '계'를 합해서 세계라고 하며 이를 또 '세간' 또는 줄여서 '세'라고 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두 가지의 뜻으로 말하는 세간은 여러 가지 물질과 현상이 끊임없이 생기(生起)고, 생겼다가 없어지는(壤滅) 시공간이다. 나고 생멸하는 곳의 이런 세간은 항상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그런데 인간들은 실체가 없는 이런 것에 집착하여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간다. 한 마디로 공허한 존재들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곳이 세간이다.

공허한 존재들의 끊임없는 생멸

한 가지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한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이론이 오늘날의 물리학이나 천문학, 그리고 생물학의 이론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란 결국 인간들이 모여서 이룬 구성체이며 이들의 질에 따라 구성체의 형색(形色)이 정해지고, 또 구성한 인간의 자질에 따라 악법으로 다스려지기도 하고, 바람직한 법으로 훌륭하게 다스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에 따라 표출되는 양상도 달라진다. 필경 그 구성원들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마음이 세상을 유지하고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마음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각(망운사 주지·동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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