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 주민 업고 대피시킨 마을이장
생비량면에선 몸에 밧줄 묶고 직접 구조도
산사태 부상 잊고 이웃 구한 스님
자신 안위보다 이웃 먼저 챙겼다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진 산청군.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주민 이야기가 하나둘씩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은 손쓸 수 없는 재난 상황이었지만, 스스로 안위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했다.
박인수 산청읍 모고마을 이장은 19일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지자 마을 곳곳을 돌며 주민들을 마을회관으로 대피시켰다. 긴급재난문자가 정신없이 울렸지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노인이 많아 집집이 들러 대피하라고 말했다.
모고마을에는 80가구 145명이 산다. 박 이장은 마을회관으로 대피한 주민을 챙기다 보이지 않는 주민 3명을 확인했다. 이들은 모두 고령이거나 장애가 있어 거동이 힘든 주민이었다. 박 이장은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곧바로 해당 집으로 뛰어갔다. 주저 없이 방으로 들어가 어르신을 업고 마을회관으로 내달렸다. 이렇게 박 이장은 차례로 81세, 78세 어르신 2명을 직접 업고 대피시켰다.
안도의 숨을 쉬기는 일렀다. 흙탕물이 내려오는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주민 한 명이 아직 대피하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 이장은 때마침 출동한 119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박 이장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민 한 명이 잠시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자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마을회관을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박 이장은 마을 순찰을 돌고 있어 이 같은 상황을 뒤에 알았다. 사고를 당한 주민은 산사태로 발생한 토사에 휩쓸려 실종됐다. 실종자 수색이 진행된 지 나흘만인 22일 마을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이장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상황이다. 찰나의 순간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이 계속 뇌리에 스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차규석 생비량면 송계마을 이장이 몸에 밧줄을 묶고 길 건너 고립됐던 마을 주민 2명을 직접 구조했다. 차 이장은 불어난 물에 70대 부부가 집에 고립돼 있다는 전화를 받고 주저 없이 나섰다. 앞서 6가구 10여 명 주민이 대피한 상황을 확인한 차였다. 차 이장은 지인 이판식 씨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막상 도착한 현장은 녹록지가 않았다. 마을 진입로가 불어난 물에 막힌 상태였다.
차 이장은 대나무밭을 헤치고 길을 뚫어 고립된 집 근처에 도착했다. 몸에 밧줄을 묶고 플라스틱 깔판(팰릿)에 의지해 물살을 헤치면서 고립된 주택에 다다랐다. 멀리 길 건너에서는 이 씨가 차 이장 목숨을 지켜 줄 생명줄을 잡고 있었다.
차 이장은 고립된 집에 도착한 후 부부의 안부를 먼저 챙겼다. 집에 물이 차 있었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고령인 부부를 무사히 구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 이장은 자신이 몸을 의지했던 플라스틱 깔판을 이용했다. 부부의 몸을 밧줄로 묶고 깔판을 잡게 한 뒤 건물 벽을 타고 천천히 집을 빠져나왔다. 물이 들어차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 물살이 흘렀고, 키를 넘는 깊은 곳도 있었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물속에서 사투를 벌인지 두 시간. 차 이장은 고립됐던 부부를 차례로 구조할 수 있었다.
차 이장은 "물이 들어차는 집에 부부가 고립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며 "길이 끊겨 119구조대도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당시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 치 앞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밧줄을 잡고 주민을 구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지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부상을 입은 상태로 이웃 주민을 구한 사례도 있다. 산청읍 지성마을 황산 스님은 19일 오전 요사채(승려들의 거쳐)에 머물다 산사태를 당했다.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흙이 쏟아져 내려왔고, 철제 컨테이너로 제작된 요사채가 몇 번을 굴러 한참을 밀려났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현장을 둘러보니 바위가 흩어져 있었고, 주변이 온통 토사 더미에 갇혀 빠져나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요사채를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아랫집도 토사가 쓸고 지나갔다. 얼핏 아랫집 화장실 건물에 사람이 있는 걸 본 듯해 다가가니 토사에 깔린 이웃이 있었다. 스님은 산사태에 놀라 달려온 이웃 주민 2명과 함께 토사에 깔린 이웃을 진정시키고 119구조대에 신고했다. 인력으로는 손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장비가 오기를 기다려 생명을 구했다. 정작 자신은 허리와 목에 부상을 당한 것도 알지 못하고 7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구조작업에 동참하다 병원으로 이동해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도로를 순찰하다 침수 차에서 인명을 구한 사례도 있다. 이종훈 산청소방서 산악구조대 소방장은 19일 오전 11시 37분께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 일대 도로를 순찰하다 불어난 물에 무릎 높이까지 침수된 차량 2대를 발견했다. 천천히 걸어 차량에 접근해 현장을 살피는 중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차량에 갇혀 있던 60대 주민 1명을 발견했다. 운전자는 불어난 물에 차시동이 꺼지자 당황해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방장은 우선 운전자를 안심시킨 뒤 차량 문을 열었다. 흙탕물이 계속 차오르는 상황에서 물살이 제법 느껴졌지만 큰 위험 없이 운전자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 소방장은 "국민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산청에서 주민 한 분이라도 무사히 구조해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산청군에서는 산사태로 토사에 깔렸던 손자가 먼저 빠져나와 집 밑 차고로 떨어진 90대 할머니를 업고 달려 목숨을 구한 사례와 산사태가 일어나기 6분 전 마을 방송으로 주민을 대피시켰던 마을 이장 사례 등이 회자되고 있다. 모두 극한 재난 상황에서 서로 의지해 소중한 생명을 지킨 사례다. 산청군에서는 재난 상황에서 인명을 구한 이들의 사례를 파악해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
/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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