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 기획] 경남에도 5.18이 있었다

(상) 5.18 민주유공자가 말하는 그날

(중)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

(하) 갈 길 먼 국가유공자 예우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수많은 희생이 그 밑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1980년 민주항쟁 하면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중심으로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만 기억합니다. 그 시절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산과 진주 두 지역을 중심으로 신군부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도내 시위 참가자 중에는 온갖 구타와 고문을 겪은 사람도 있고, 드물지만 5.18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도 있습니다. 그들은 4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긴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봄’ 시기 민주화를 열망했던 21살 청년 김지회 씨는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사회가 낙인찍은 범죄자가 돼 있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썼다. 그는 단 한 번도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들의 활동을 찬양한 적 없고, 동조하거나 반국가단체를 도운 적도 없다. 마산에서 시위를 한 게 전부다. 그렇지만 엄혹한 시절 창원에 있던 육군 보안사로 끌려가 무차별 폭행과 고문을 겪었다. 아무리 호소해도 손찌검만 돌아왔다.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더. 그런 짓 한 적 없어예. 정말이라예. 믿어 주이소.”

대학생들이 1980년 5월 중순쯤 3.15의거탑 옆 도로에서 연좌농성을 요구하고 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대학생들이 1980년 5월 중순쯤 3.15의거탑 옆 도로에서 연좌농성을 요구하고 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또 독재? 전두환 신군부를 향한 분노 = 모든 비극은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비롯됐다. 1980년 4월 초, 마산대학 가포캠퍼스(현 국립창원대학교) 무역학과 2학년생 지회 씨는 학교 근처에 얻은 하숙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국 상황에 덜컥 화가 치밀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박정희가 숨졌지만, 군부 재집권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또 군인이 정권 이양도 안 하고 독재정치 하는 거 아이가?” 다섯 달도 채 되기 전인 1979년 11월 24일에는 무려 18년간 이어졌던 유신독재 부활 조짐을 경고한 서울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참석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그해 12월 12일에는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다.

지회 씨는 하숙방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들에게 시위를 제안했다. “내일이라도 데모해야 안 되겠나?” 가만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말에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에는 평소 지회 씨를 잘 따르던 친구 10명 정도가 있었는데, 훗날 자신들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예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학내외 가두시위 주도 = “데모해야 하는데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지회 씨와 그 친구들은 술자리 다음 날 강의실을 돌면서 사람을 모았다. 학교 본관에서 방송 장비를 이용해 “학우 여러분 빨리 밖으로 나오세요”라고 호소했다. 시위 참여 독려에 대학 전체 정원 1000여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500명 정도가 운동장으로 나왔다. 학교 안팎에서 “신군부 물러가라”라는 규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내 시위만 그해 4월에만 서너 차례 이어졌어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말 잘하는 친구들에게 발언대에 서달라고 부탁했고,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해 달라고 했지요. 예술에 소질이 있던 한 친구에게는 1인 연극을 요청했어요. 백성들이 배가 고프고 나라가 어려우니 군인들이 재집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공연이 올랐지요. 학생 사이에서 호응이 컸어요.”

지회 씨는 시위 열기가 시들해진다고 느끼고 대학 정문 앞에 앉아 단식 투쟁을 일주일 정도 벌이기도 했다. 이어 5월 12~13일쯤에는 학생들과 마산 시내까지 진출했다. 가두시위 때 선봉에 서서 북을 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직접 쓴 시국 선언문도 낭독했다. “신군부는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군사독재로 가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역사가 재탕돼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도 끝내야 합니다.”

가포캠퍼스부터 시작해 월영동 댓거리, 서성동 3.15의거탑까지 행진이 이어졌다. 경남대 학생들도 댓거리에서 합류했다. 시위가담자 수는 모두 합해 300명 정도. 경찰은 시위대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경남대 학생들이 1980년 5월 중순쯤 옛 마산MBC 건물 앞을 지나 3.15의거탑 방향으로 행진하며 비상계엄 해제와 과도정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경남대 학생들이 1980년 5월 중순쯤 옛 마산MBC 건물 앞을 지나 3.15의거탑 방향으로 행진하며 비상계엄 해제와 과도정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붙잡혀 가서 당한 숱한 고문·폭행 = 5월 15일 휴교령이 내려졌다. 지회 씨는 마침 농번기라 밀양 고향 집으로 돌아가 경운기로 논을 갈며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5월 24일쯤 일을 마치고 저녁에 고향 친구들과 당구를 치려고 나섰다가 덩치 큰 남성 5명에 체포됐다. 경남도경찰국 대공과 형사들이었다.

“차에 태우고 보자기로 눈을 감싸더라고요. 1~2시간 정도 가다가 어딘지 모를 장소에 도착해서 손과 몸이 포승줄에 묶였어요.”

곡괭이 자루를 든 2명이 무자비하게 폭행을 했고, 지회 씨는 맞다가 의식을 잃었다. 깨보니 독방에 혼자 갇혀 있었다. 수감 기간 9일 중 7일은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을 사정없이 맞았다. 그 뒤로는 발바닥만 가격당했다.

갇혀 있는 내내 수사관들이 한숨도 못 자게 했다. 조금이라도 졸면 M16 총기 가늠쇠로 머리를 내리쳤다. “누구에게 사주받아서 시위를 주도했는데?” 하루에 몇 번이고 수사관이 찾아왔다. 집에 간첩이 있지 않은지도 캐물었다. 그때 온갖 폭행에 지회 씨는 왼쪽 청력을 잃었다.

“제가 잡혀 있던 곳이 경남보안대 본부라는 사실을 안 것은 보안사에서 39사단 헌병대 수감시설로 이감될 때 안내 팻말을 보고서였어요. 헌병대에서 며칠 더 수감 돼 있다가 다시 본부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고 풀려났어요.”

그가 쓴 서류는 다시는 사고 치지 않겠다는 각서와 한 차례도 수사관에게 맞은 사실이 없다는 서약서 둘이었다. 무조건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안 쓸 수 없었다.

5.18 민주유공자 김지회 씨가 지난 16일 오후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단감 밭 주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5.18 민주유공자 김지회 씨가 지난 16일 오후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단감 밭 주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평생 따라붙은 ‘빨갱이’ 꼬리표 =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열흘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93㎏던 몸무게는 78㎏으로 확 줄었다. 아버지는 “인생 조졌으니 앞으로 조용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 겪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풀려났다고 모든 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수사관이 수시로 집에 찾아왔다. 동태를 살핀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가족에게 “재수감될 수 있다”며 협박했다. 부모는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경찰관에게 술 접대도 했다.

몸이 피폐해져 군 전역 후 취직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고향에서 장사도 하고, 단감 농사도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자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올해 만으로 62살이 된 지회 씨에게 청년 시절 겪은 상처는 지금도 여전하다. 44년 전 잃은 청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환청까지 들린다. 바로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는데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과 말하듯이 목소리가 높다. 지난 16일 만난 그날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지회 씨는 민주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2년 8월 14일 ‘5.18민주유공자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도 색깔론을 앞세워 5.18민주화운동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 주변에 자신이 유공자라는 사실을 숨긴다.

“그때 같이 잡혀갔던 친구 둘은 구타와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고, 그 시기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어요. 다시는 이 땅에서 국가 권력이 폭압을 자행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목소리를 내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그 당시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아요.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다시 투쟁할 거예요.”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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