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클래식 이야기 <거미집>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

봄이 왔다. 벚꽃은 만개했다 짧았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사라졌다. 영하 날씨에 폭설로 말미암은 피해를 안타까이 보도하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다. 그렇다면, 이제 곧 여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 되어 겨울을 만나겠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는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도 지구의 역사와 같을 만큼일 것이다. 

지면을 통해 소개하기 쉽지 않은 곡들이 있다. 너무 생소해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반대도 있다. 영화를 통해 소개할라치면 너무도 많이 등장하여 '다음에' 하며 넘어가는 경우다. 심지어 이 작품으로 지면을 채우다니 독자에 대한 모독이지 아닐까 여겨져 꺼려질 정도다. 하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근데 막상 시종을 들어 보았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주위에 너무도 흔하게 흘러 마치 온전히 들은 것만 같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 ~ 1741)의 '사계'(The Four Season)다.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먼저 왜 '사계'인지를 알아야겠다. 그러려면 우선 작품명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곡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집 Op. 8 '화성과 창의의 시도' (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Op. 8) 중 No.1에서부터 No.4까지를 따로 떼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Op. 8 No.1 ~ Op. 8 No.4다. 뭐가 이리 복잡할까 싶지만, Op는 출판 순서, No는 출판된 악보의 몇 번째 곡인가로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당시의 출판문화는 12개의 곡을 묶어 하나의 작품집으로 출간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여 '화성과 창의의 시도'는 작품집의 제목이며 총 12개의 곡으로 묶였다. 그중 1번부터 4번까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란 제목이 붙었고 이를 따로 떼어 놓아 간단히 '사계'라 칭하며 선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계'는 음악사에 있어 표제음악의 시조새로 불린다. 계절을 표제로 한 음악으로 각 계절의 특징이 악상에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표제적이라 할 것은 각 곡에만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악장(계절별로 3악장, 총 12악장)마다 소네트(짧은 정형시)가 붙어 계절이 지닌 특징적 장면을 정확히 안내한다는 것이다.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절은 같구나' 다. 그만큼 계절이 지닌 심상과 광경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시작을 여는 봄의 소네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봄이 왔다." 이처럼 짧은 문장이 음악이 되었고 작품을 대표하는 선율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새들이 노래로 봄을 반기고 샘물은 속삭이듯 흘러간다. 그러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지만 이 역시도 봄을 알리는 소리다. 폭풍우가 지나면 새들은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주인공인 바이올린이 등장해 새들의 노래를 절묘하게 묘사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계'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란 사실이다. 하니 바이올린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체로 소네트 대부분을 묘사한다. 하니 '봄이 왔다'를 묘사한 유명한 시작 부분은 전주에 속하며 앞으로 이어질 풍경의 준비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기억하는 선율은 여기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주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양치기를 표현한 2악장이 지나고 3악장에 이르러 다시 한번 봄의 찬란함을 춤추며 '봄'은 끝이 난다. 

여름 1악장의 소네트는 내리쬐는 햇살과 새의 노래, 그리고 태풍이다. 과연 이완과 긴장을 절묘하게 오고 가며, 보이는 듯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어지는 2악장에서는 모기떼의 극성으로 성가신 양치기가 묘사된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곧 태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3악장에 들어 양치기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우르릉 쾅쾅, 우박이 쏟아져 내려 다 자란 이삭을 때린다."

현란한 현의 움직임으로 천둥 번개와 우박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뭇매 맞을 표현이지만 실로 장관이다. '사계'의 악장 별 인기의 정도는 역사를 지닌다. 처음 세상에 등장하였을 때는 봄의 1악장과 겨울의 2악장이었다. 지닌 표현이 싱그럽고도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이후 겨울의 1악장이 이를 물려받았고 현재에 들어 여름의 3악장의 인기가 두드러진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이러한 추세에 한몫을 거든 영화가 있다. 바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영화는 억압과 불평등의 시대를 살다 간 두 여인의 삶과 사랑을 다룬다. 정략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길을 찾을 수 없는 마리안느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시대가 수용하기엔 너무도 주체적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관습에 굴복하였지만, 잠시나마 이뤄낸 평등의 세계는 희망을 품기에 충분하다. 웰메이드 퀴어무비로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가을이다. 모두가 성공적인 추수에 흥겨운 가운데 거나해진 농부가 잠에 빠져든다. 공기는 상쾌하고도 맑아 평화로운 휴식의 계절이다. 농한기를 맞아 사냥에 나선다. 짐승들은 도망치고 사냥꾼들은 뒤를 쫓는다. 

이렇듯 비발디는 추수의 즐거움과 풍요로운 정취를 음악으로 구현하였다. 영화 '헬보이: 골든 아미'에 상당히 노골적으로 등장, 천재이자 클래식 애호가인 물고기 인간 에이브의 거실엔 늘 비발디가 흐른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 1악장의 소네트엔 이렇게 적혔다.

"눈이 쌓인 길을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뛰어간다. 너무 추워 이가 딱딱 부딪힌다."

영화 <올드보이>를 통해 소개했던 악장으로 사람들이 추운 거리를 종종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다. <올드 보이> 외에도 이 악장이 영화에 사용된 예는 넘쳐난다. <존 윅 3: 파라벨룸>에서는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흘러나온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웬즈데이>의 주인공 여자아이가 폭탄이 터지는 가운데 태연히 앉아 첼로를 연주하던 곡이 바로 겨울의 1악장이다. 이처럼 상황에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장면, 심지어 고통을 잠재우는 진통제 선전에서도 사용되었다. 분명히 악상이 어울리는 바가 있어서겠지만 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추운 겨울 거리를 바삐 걸어 집으로 향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정겹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2악장은 이 모든 긴장감을 해소한다. 어찌 이게 겨울인가 싶지만, 따뜻한 난롯가에서 앉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정겹고도 평화로운 장면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은 다시 다가올 봄을 준비한다. 그렇기에 겨울마저도 즐거움의 계절이다.

  /심광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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