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3.15 부정선거가 자유당 강경파들이 주도했다면서 이승만 책임론을 부정한다. 이승만으로서는 야당 후보 조병옥 급사로 당선이 확정된 터라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고, 당시 국무회의 기록을 봐도 이승만은 부정선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는 정부 최고 책임자이자 자유당 총재였던 이승만의 책임이 가장 크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민주당 후보가 이기붕을 누른 데다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참패했다. 이승만은 정권 유지에 불안감을 느껴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계획한다. 당시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잔여 임기를 승계하게 되어 있었기에 85세 고령인 이승만으로서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이 아주 중요했다. 이승만이 임명한 심복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1959년 11월부터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구체적인 부정선거 방법을 국내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지시했고, 부정선거 방법은 3.15 선거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승만은 2월 13일 긴급 담화를 발표하여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국민을 위협했다. 1960년 3월 초 주요 신문들은 민주당이 폭로한 구체적인 선거 부정 방법을 자세히 보도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승만은 마산의 연이은 시위에 대해 4월 13일 "마산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도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이승만 독재에 맞선 4.19혁명조차 이승만 교육정책에 따른 국민 자각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육의 급속한 확대는 일제 패망 후 국민의 교육 열망이 솟구친 결과였을 뿐이다. 이승만 정부는 일민주의와 반공주의로 오히려 민주시민의식의 성장을 막았다. 보수진영은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책임까지 부정하는 억지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승만의 과오를 정확하게 평가해야 그의 공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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