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 모임에서 마산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보통 아귀찜, 유명 씨름선수를 말하면서, 1960년 3월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의거와 1979년 유신정권을 끝낸 부마민주항쟁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승만은 12년간 지속한 장기 집권을 연장하고,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4할 사전투표, 3~5인조 투표, 관권 총동원, 부정 개표, 야당 인사 협박 등 다양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불의를 참지 못한 시민 저항에 실탄 발포를 하자 민심은 들불같이 번져 결국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1일 17세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시민 항거는 극에 치닫게 되면서 시내 곳곳이 격렬한 시위 현장으로 바뀌었다. 결국 하와이로 망명하고 이기붕 가족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2010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국립3.15 민주 묘지가 지어지고,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을 말로 글로 다 할 수가 없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고자 조직된 관변 단체로 1950년 6.25전쟁 전후로 수만 명이 군과 경찰에 살해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가 2015년 책 <그 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를 발표하는 날 유족들은 한없는 울음을 쏟았다. 마산교도소에 갇혔다가 수장된 사람만 1681명이라고 했다. 감효전 유족은 지금도 비가 오면 괭이바다를 찾는다고 한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탄핵 1호였다. 신채호는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너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제주 4.3은 아이에서 어른까지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학살되었다. 1947년 3.1절 발포로 주민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를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 이후 처음으로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자기 국민을 이렇게 수없이 학살한 이승만을 국부라며 기념관을 지으려고 하고 있다. 불교계는 1954년 '사찰 정화 유시'로 대처승 축출과 농지개혁으로 전통 사찰을 빼앗은 것과 종교 편향 등의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은 국가와 민족에 지워질 수 없는 수많은 불법을 인정하는 반역사적 행위이다. 목숨 바쳐 반만년 역사를 지켜온 순국선열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 마산의 상징은 불의에 항거한 시민정신이다.

/김수곤 경남국학원 교육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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