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획득 수단 되면 스트레스만
언어 식민성 벗어나는 배움 돼야

요즘 영어에 뒤덮여 산다. 낮에는 대학원 입시를 위한 토플시험 준비에 전념하고, 저녁에는 귀가한 학생들과 직장인들에게 영어 과외를 한다. 영어를 '독학'했다고 자부하기에, 영어에 큰돈 쓰는 것만 한 낭비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영어로 유일하게 벌어먹고 사는 현실은 아이러니이다. 동시에 나는 '비원어민'으로서 영어 실력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놓여있고, 영어권 나라가 아님에도 영어를 못하면 '인정' 받지 못하는 뭇 한국인들의 스트레스를 좀먹으며 돈을 번다. 영어 교육 상품의 수요자이자 동시에 공급자인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은 가히 '영어 공화국'에 진배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새로운 언어 배우기를 좋아했다. 당시 나는 영어를 배우는 것이 그 언어 권력에 승차하는 일인 줄 몰랐다. 영어 능력은 나에게 국외 유학의 길을 열어주고, 인간 관계를 초국적으로 확장시키고, 나의 시간당 노동 단가를 높여주었다. 영어가 말 그대로 '밥을 먹여주는' 현실 앞에 마음이 복잡하다. 유학 시절, 말이 떨어지지 않는 고통을 나는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영어 앞에서 떨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 앞에서 '야, 너도 할 수 있어'라고 으스대며 내가 눈물과 열패감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것을 다시금 팔아먹고 있는 셈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내가 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더 많은 듣는 귀를 얻는 것과 같고, 동시에 그 듣는 귀가 되어 힘 있는 말하기를 듣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에 한창 몰두해 있던 때 나는 의지적으로 수어교실을 다니기도 했다. 수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됨으로써 그 세계의 말하기를 (은유적 의미로서) '듣는 귀'가 되기 위함이었다. 영어는 이미 강력한 언어이지만, 그 힘에 '편승'하기 위한 수많은 비영어권 학습자들의 '배움'을 통해 계속해서 강성해지고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나는 회화 수업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영어가 '눈 파란 외국인'들의 언어라는 관념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영어는 인종과 국경을 거슬러 다양하게 변용되는 유연한 언어임에도 '말하는 자'가 서구인의 전형성에 부합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당장에 원어민 교사를 채용함에서 '유색 인종'을 선호하지 않는 현실만 보아도 그렇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미국식이냐 영국식이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그 외'의 억양은 무시된다. 하다못해 한국에서 조롱당하는 일본식 발음, 사실 난해함 면에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식의 '콩글리시'도 다 영어라는 언어 실천의 일면이다. 언어의 정통성과 순수함을 주장하는 건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며 특히 영어에 대해서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아우르는 문제로 여겨진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은 모종의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나란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어 배우기가 권위적 실천이 되지 않으려면 영어를 두려워하지 않고, 유창한 영어의 압도하는 힘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영어학원 광고들이 '자신감'을 강조하는 것은 영어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위축시키는 힘에서 시작된 까닭이다. 자신만의 억양으로 당당히 말하고, 다른 이들의 낯선 억양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안에 언어의 식민성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영어는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고 있다. 그곳이 지극히 한국적인 우리들의 일상 속이 아니란 법은 없다.

/백소현 프리랜스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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