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기록 해묵은 과제 

현재 (상) 매일신보에 비친 경남의 3.1운동

다음 (하) 청산하지 못한 친일재산


한국 근·현대사는 105년 전 3.1운동을 중요한 장면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대 기록은 풍부하지 않고 단편적입니다. 당시 유일한 전국 단위 신문인 <매일신보>(현 서울신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이 신문은 3.1운동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경남지역 상황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처음 보도한 시점은 1919년 3월 6일이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지 닷새 뒤다. 보도 시점도 늦지만 애초에 3.1운동을 보는 시선부터 곱지 않다. 그나마 이 시기 전국에서 발생한 3.1운동 소식을 짤막하게라도 전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은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6일 자 신문. 민족자결주의의 오해라는 제목으로 상단에 사설이 실렸다. /국립중앙박물관
매일신보 1919년 3월 6일 자 신문. 민족자결주의의 오해라는 제목으로 상단에 사설이 실렸다. /국립중앙박물관

◇“3.1운동은 소요 사건” = <매일신보>는 3월 6일 자 1면에 배치된 사설 ‘민족자결주의의 오해’에서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이나 인도, 필리핀, 하와이 같은 민족이나 지역과는 해당 사항이 없으므로 그릇된 신념을 갖고 있거나, 물든 사람들은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3.1운동을 ‘각지의 소요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1910년 일본이 조선과 합병한 것은 두 민족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주장도 폈다.

<매일신보>는 7일 자 신문부터 전국 시위 상황 보도 비중을 늘렸다. 민족대표 33인 이름을 소개했고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사실을 지역별로 구분해 보도했다. 같은 날 사리원에서 태극기를 선두에 든 군중 무리 수십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여 해산 명령이 내려지는 과정에서 그중 일부가 체포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당시 유일했던 한글 전국 신문

"민족자결주의 오해·틀린 신념"

조선총독부 기관지 한계 또렷

3월 8일 자 신문은 평양에서 여학생이 만세를 외쳤고, 평안남도 성천지역 헌병대장이 시위대 탓에 위독하다고 알렸다. 평안남도 강서지역 헌병소가 전멸했다는 기사도 있다.

3월 10일 자에는 평안북도 철산에서 5000명의 군중이 몰렸다고 전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7일 자 신문. 경남을 포함해 전국 지역별 3.1운동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매일신보 1919년 3월 7일 자 신문. 경남을 포함해 전국 지역별 3.1운동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경남지역 3.1운동 = 경남지역 3.1운동 소식은 3월 22일 자 신문에서 볼 수 있다. 이날 실린 ‘소요사건의 후보, 경상남도 동래, 단지하여 선언서’ 기사를 보면 범어사 지역 중학생 30여 명이 모임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여기서 언급된 동래는 현 부산시 동래구다.

장날을 이용해 시위 규모를 넓힌 정황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3월 22일 자 ‘소요사건의 후보, 경상남도 합천, 장날을 이용하여’에서 “19일 오후 4시경에 군중 약 300명이 장날 기회를 이용해 시위운동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또 주동자를 체포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는 내용도 나온다.

같은 날 신문을 보면 진주에서는 오전에 다수 군중이 시위를 개시했고, 오후 3시에 이르러서는 돌을 던지며 수위를 높였다고 전했다.

의령에서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 관헌군대도 출동했는데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없자 시민을 향해 발포가 이어졌다고 나온다. 사망자가 10명이 죽고 12명이 부상을 겪었다. 시위를 막던 군인 1명도 다쳤고, 진주 시위는 진주 각 면에 6000여 명이 모여 벌떼같이 시위가 번질 조짐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매일신보>는 마산경찰서 관할 지역인 함안에서도 시위가 발발했다는 보도에서 “순사주재소 제지를 듣지 않아 야단쳤고, 밤이 돼서야 중포병대가 가서 진압했다”고 했다. 이어 “함안군수와 한 경찰이 시위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덧붙였다. 검거된 시위대 30여 명은 3월 20일 자동차로 마산경찰서에 호송됐다.

또 이날 ‘소요사건의 후보, 경상남도 통영, 독립기를 세우고’에서 시민들이 19일 낮 ‘조선 독립’이라고 크게 쓴 기를 앞세워 길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와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전했다. 그중 기독교 선교사가 22명이 있었고,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인 유학생 4명이 귀국해서 선동했다는 소문이 있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경찰들은 밤새 경계 근무를 서기도 했으며, 각 면장에게 훈시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22일 자부터 경남 상황 언급

합천·진주·의령·함안·통영 등

격렬·대규모 시위에 '불온' 매도

3월 27일 자 신문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한 시위대 중 유죄판단이 나온 사람이 1800명, 21일 오후 4시 진주에서 자동차를 억지로 에워싼 시민들이 진주에서 삼천포로 가는 중이던 차량 탑승객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앞을 못 가게 막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30일 자에서는 양산에서 군중 2000여 명이 종이로 만든 기를 앞세워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외쳤고, 주모자를 헌병대가 포박해 분견소로 끌고 가도 군중은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분견소와 군청을 엄습하는 등 민심이 불온한 모양이라고 보도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 진주지역 3.1운동 관련 기사 등이 실려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매일신보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 진주지역 3.1운동 관련 기사 등이 실려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무모하고 어리석은 시위로 폄훼 = <매일신보>는 전국 상황을 전하면서도 3.1운동 의미는 깎아내렸다. 5월 5일 자 ‘소요 후의 민정, 점차 각성, 소요를 나무라며 후회하는 사람들’이라는 보도에서 “이 같은 망동은 아무 소용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도리어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정책을 더욱 고압케해 곤경에 빠질 수 있다”며 “속히 망동을 그치고 잘못을 깨달아 선량한 정신으로 업무에 힘쓰는 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썼다.

3.1운동 이후 <매일신보> 보도는 ‘소요 사태’로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전국 상황을 간추려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하지만 애초에 3.1운동을 보는 시선, 상황에 대한 해석, 의미를 짚는 면에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민족대표가 일본정부에 보낸 글. 1919년 3월 3일 마산 무학산에서는 김용환(金容煥)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후 단독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날은 경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날이다.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가 있던 마산부 무학산에서 행사에 참석한 김용환은 약 2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군중들에게 줬다. 경찰이 그를 제지해 즉시 연행됐고, 시위는 확대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민족대표가 일본정부에 보낸 글. 1919년 3월 3일 마산 무학산에서는 김용환(金容煥)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후 단독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날은 경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날이다.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가 있던 마산부 무학산에서 행사에 참석한 김용환은 약 2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군중들에게 줬다. 경찰이 그를 제지해 즉시 연행됐고, 시위는 확대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그 당시에는 조선인이 신문을 만드는 걸 금지되던 시절이라 한국어 신문은 매일신보가 유일했다”면서도 “사실이 아닌 보도도 많아 정확한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로 판단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위원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흐름이지만 당시 시위들은 학교나 교회와 같은 곳에서 사전에 조직한 사람이 있었다”면서 “주로 장날을 이용해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장꾼들 속에 학생들이 한 명씩 들어가서 만세를 외치면 군중들이 합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매일신보> 보도에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당시 시위 전개 상황이다.

박 연구위원은 “경남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정확한 인원은 누구도 알긴 어렵지만, 경남 최초는 함안 연개장터 시위를 이야기한다”면서 “마산에서 군중이 모인 앞에서 선언서를 뿌리고 독립만세를 외친 3.3 단독시위에도 의미가 더 부여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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