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면서 답이 되는 가르침
삶·우주 진리 깨우치는 '수담'

내게는 <왜,>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있다. 해냄출판사에서 나온 홍보용 비매품인데 강원도 화천에 계셨던 사부께 받은 책이다. 속지에는 1999년 파스텔로 그린 그림이 있고 내용은 비어 있는 책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빈 노트로 '왜'라는 글자 옆에 의문부호가 아닌 쉼표가 있다.

생전에 무엇 하나 소홀히 다루지 않았던 사부께서 의미 없는 빈 노트를 부록으로 내셨을 리 만무하다고 여겨 유품처럼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다 왜 이런 책을 홍보용 부록으로 제작하고 주셨을까 하는 질문이 불현듯 뇌리를 쿵 하고 때렸다. 그리고 이내 소름이 돋았다. 혹시 '왜,'는 질문이 아니라 답이 아니었을까? 사부를 뵈면 이따금 선문답 식으로 나의 공부를 점검해주셨던 것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해졌다. 평범한 노트가 아닌 한 글자로 쓴 사부의 작품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사부와 바둑을 두던 장면을 복기해 보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내가 사부를 지도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내실 그렇지 않았다. 바둑의 별칭이 수담(手談)이듯 돌들의 운석에 따라 무수한 대화를 하며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하수에게 지도받는 고수, 하수에 불과한 나를 얼마나 답답해하며 지도하셨을까 생각하니 코에 돌덩이를 맞은 듯 더욱 시큰거렸다.

바둑을 두면 '왜'라는 질문을 무수히 직면하게 된다. 상대가 한 수를 놓으면 '왜' 거기다 놓았을까 하고 고심하다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답이기도 하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면 질문도 되는 것이다. 바둑돌 놓는 것 자체가 질문과 답이라니! 그래서 바둑이 수천 년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고대에 바둑을 단순한 놀이가 아닌 삶을 성찰하는 수행 도구로 사용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선시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사예(四藝)인 금기서화(거문고, 바둑, 글, 그림)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이전 시대인 고려시대 충숙왕 12년의 조연수라는 분의 묵서명에도 이런 글이 있다. 지금 동한(東韓) 평양(平壤)의 조사공(趙司空)은 부귀가 지극하고 용모와 거동이 수려하며 재능과 지혜가 가지런하고 견식과 도량이 넓으며 음률에 잘 통달했고 특히 글쓰기, 그림 그리기, 활쏘기, 말타기에 뛰어나서 부족한 점이 없었으니, 군자의 여섯 기예(六藝) 중에서 오직 하나 바둑만 모자랄 뿐이다.

육예(六藝)는 동이족의 나라 상(은)나라에 이은 주나라에서 행해지던 교육과목이었던 음악, 궁술, 말타기, 글과 그림, 수학을 말하는데 고려의 육예는 수학이 아니라 묵서명의 기록에 보듯이 바둑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남송시대에 저술을 시작해 1349년 원나라 때 완성한 <현현기경>의 사활문제에는 당대 학문적 깊이를 반영해 문제 하나마다 사자성어나 고전의 글귀를 붙여 놓았다. 대표적인 예로 '칠자지모세(七子之母勢)'라고 이름 붙여진 문제는 돌 일곱 개가 견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묘수 한 수를 당하는 순간 자멸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시경에 나온 '아들이 7명이나 있으나 어머니 한 명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다'라는 어구를 이용했다.

<박물지>에는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가 바둑을 썩 잘 두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바둑을 만든 까닭을 어리석은 아들 단주를 깨우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쩌면 바둑은 삶의 진리와 우주의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을까. '왜,' 라는 답과 질문을 그대 손등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조용성 경남바둑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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