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속 경남 - 함안 삼수정

한종유 시 통해 고려시대 존재 확인
훗날 정구가 중수하며 <함주지> 기록
이의현 연작시 속에서도 함안 대표해

19세기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져
함성중 근처 어딘가에 복원되길 기대

[여지도(輿地圖)] '함안군(咸安郡)', 시기 미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함안읍성 북문 안쪽에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객사의 대문 밖 10보 되는 곳에 삼수정이 있었다.
[여지도(輿地圖)] '함안군(咸安郡)', 시기 미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함안읍성 북문 안쪽에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객사의 대문 밖 10보 되는 곳에 삼수정이 있었다.

예로부터 함안(咸安)은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역사가 깃든 유서 깊은 공간이자 산수가 아름다운 승경의 고장으로 일컬어졌다. 특히 멋진 풍광은 문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고 이를 감상하기 위한 누정(樓亭)이 들어섰음은 물론이다. 당시 함안의 누정들은 저마다 운치를 뽐내며 이름을 자랑했다. 지금은 사라져 대부분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전하는 기록에서 과거의 면모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삼수정(三樹亭)은 단연 주목되는 공간이다.

삼수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이름이 아니다. 함안군 문화관광 페이지에서 악어담(鰐魚潭)과 함께 소개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악어담은 지금의 함안향교 입구 오른쪽 산기슭 아래에 있던 덕암서원(德巖書院) 옆의 소(沼)를 가리킨다고 한다. 삼수정은 악어담 남쪽에 있던 정자로 지금의 중촌동에 있는 함읍교(咸邑橋) 서쪽 산 밑쯤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그러할까. 삼수정은 함안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누정으로 판단된다. 과거에 잠자고 있는 삼수정의 역사를 돌아본다.

◇고려 때부터 있던 정자 조선 중기 중수

삼수정은 이름 그대로 세 그루의 나무 곁에 있었던 정자이다.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자세하지 않지만 한종유(韓宗愈·1287∼1354)의 시를 통해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古樹蒼蒼壓路傍(고수창창압로방·오래된 나무 푸르게 길가에 드리우니) 
至今遺俗李爲名(지금유속이위명·지금도 풍속에 이씨(李氏)가 명가라 하네)
行人且莫尋常看(행인차막심상간·행인들 또한 심상하게 보지 말게나)
生長孫枝滿洛城(생장손지만낙성·자라난 후손들 낙성(洛城)에 가득하도다)

-한종유(韓宗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영(題詠)>. 

한종유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이다. 고려 말기 명신으로 저자도(楮子島)에 은거하여 양화사(楊花詞)를 부른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전기 공신이었던 권근(權近)의 외조부로도 유명하다. 한종유가 언제 함안을 지나며 이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삼수정의 나무를 읊은 시로 후대에까지 널리 회자한 작품이다. 삼수정이 이미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한종유는 고목이 길가를 뒤덮었고 이 나무가 이씨 집안과 관련이 있음을 언급했다. 여기서 말한 이씨가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지만, 후손들이 서울에 가득하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방실(李芳實·1298∼1362) 집안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방실의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충목왕(忠穆王)을 호종해 원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고, 공민왕 때 벼슬이 거듭 올라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이름을 떨쳤다. 섣불리 주인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가 지어진 시기를 볼 때 삼수정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라 하겠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함안초등학교 체육관이며 맞은 편에 비봉산이 보인다. 삼수정은 함안군 함안면 함안초등학교와 함성중학교, 함안면공설운동장과 비봉산이 잇대어 있는 이곳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재영 기자
앞에 보이는 건물은 함안초등학교 체육관이며 맞은 편에 비봉산이 보인다. 삼수정은 함안군 함안면 함안초등학교와 함성중학교, 함안면공설운동장과 비봉산이 잇대어 있는 이곳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재영 기자

조선이 건국하며 삼수정은 잠시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조선 중기에 중수되며 비로소 부흥을 맞는다. 1587년(선조 20) 정구(鄭逑·1543∼1620)는 함안군수를 지내던 시절 함안의 연혁과 풍속 등을 정리해 <함주지(咸州誌)>를 편찬했다. <함주지>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로 평가되는데 여기에 삼수정의 기사가 나온다.

삼수정: 객사(客舍) 대문(大門) 밖 10보 정도 되는 곳에 있다. 나무 세 그루가 정립(鼎立)해 있어 명명되었다. 한 그루가 가장 높고 오래되니 크기가 30아름 정도 될 만하고, 그늘이 관도(官道)를 덮어 천여 명을 가릴 만하다. 옛날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든 것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여름, 고쳐 쌓아 높이는 5척 남짓이고 둘레가 149척이다. 바람을 맞아 시원하고 상쾌하여 온 성에서 제1의 정자가 되었다.
-정구(鄭逑), <함주지(咸州誌)> 권 1, '삼수정'.

삼수정의 대략적인 사실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객사 대문 밖 바로 앞에 있던 누정으로 나무 세 그루에 따라 명명된 것이라고 하였다. 가장 높고 오래된 한 그루는 아마도 한종유가 읊은 시에 나왔던 나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구가 부임할 당시 삼수정은 무너져 사라지고 기단으로 쌓았던 대마저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에 정구는 삼수정을 다시 지어 함안 최고의 정자를 회복했고 이에 대한 제도도 수치를 들어 명확하게 기록했다.

◇함안군 대표 누정으로 널리 회자

정구에 의해 복원된 삼수정은 이후 함안군을 대표하는 누정으로 회자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이의현(李宜顯·1669∼1745)은 1711년(숙종 37)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근무하다가 10개월 만에 체직되어 돌아간 적이 있다. 당시 벼슬하는 동안 임지 내의 여러 고을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떠나는 마당에 각각의 고을이 지닌 특징적인 모습을 연작시로 읊어 순행을 대신했다. 여기서 함안을 두고 읊은 시에 삼수정이 나타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1712년(숙종 38) 이의현이 함안을 노래 한 시는 다음과 같다.

巴山西北是咸州(파산서북시함주·파산의 서북쪽이 바로 함주이니)
三樹亭前樹影稠(삼수정전수영조·삼수정 앞으로 나무 그림자 빽빽하네)
故老尙傳魚趙里(고로상전어조리·옛 늙은이 여전히 어씨와 조씨 마을 전하고)
遺風不沫穆公休(유풍불말목공휴)유풍에 문목공(文穆公)의 은혜 없애지 않았구나)

-이의현(李宜顯), <도곡집(陶谷集)> 권 1, '내가 남쪽에 와서 한 해를 보냈는데 당시 재상의 배척으로 연달아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느라 여러 고을을 순행하지 못했다. 지금 장차 체직되어 돌아가며 부질없이 칠언절구를 읊어 온 도의 산천 풍속을 차례대로 기록해 유람을 대신한다(余來南經年, 而以時宰之斥, 連章乞免, 不得巡行列邑. 今將遞歸, 漫賦七絶, 歷敍一路山川風俗, 以替遊覽)' 중 81수.

경상도 고을을 제재로 삼은 연작시 가운데 함안을 읊은 시로 제81수에 해당한다. 이의현이 바라본 함안의 특징이 구구절절 요약되어 있다. 1구에서 파산(巴山) 서북쪽에 함안이 위치한 사실을 밝혔고, 이어 2구에서는 삼수정이 함안의 대표적인 누정임을 말했다. 삼수정의 명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3구에서는 어씨와 조씨 마을의 위상을 언급하고 4구에서는 문목공이 선정을 베푼 사실이 기억됨을 기록했다. 어씨와 조씨는 함안의 명가로 이름난 함종어씨와 함안조씨를 가리키고, 문목공은 함안군수를 지내며 자취를 남긴 정구를 가리킨다. 삼수정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한 함안의 대표적인 누정으로 기억되었다.

삼수정은 함안군 함안면 함안초등학교와 함성중학교, 함안면공설운동장과 비봉산이 잇대어 있는 이곳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관아를 옆에 끼고 있었던 비봉산 전경.    /조재영 기자
삼수정은 함안군 함안면 함안초등학교와 함성중학교, 함안면공설운동장과 비봉산이 잇대어 있는 이곳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관아를 옆에 끼고 있었던 비봉산 전경. /조재영 기자

◇객사 앞 삼수정은 어디에?

이러한 삼수정은 19세기까지 남아 존속했다. 최석봉(崔錫鳳)은 <영지요선(嶺誌要選)>에서 삼수정에 대해 "한강(정구)이 고쳐 짓고 존비(尊卑)를 엄격하게 구별하니 비록 깊은 밤이나 찌는 듯한 더위가 이르러도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감히 오를 수 없었기에 그 제도가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1876년(고종 13) 무렵으로 당시만 해도 객사의 대문 밖 어딘가 무성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 옆에 당당하게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날 함안 객사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삼수정도 결국 무너져 역사 속에 사라졌다. 함안 객사는 오늘날 함성중학교 일대로 추정되니, 그렇다면 삼수정도 그곳 어딘가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옛 지도에 객사가 함안 읍성 북쪽에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함성중학교 북쪽 북촌리 일대에 있었던 것일까? 객사의 위치가 복원되면 삼수정의 모습도 회복할 수 있을 듯하다. 아름다운 봄날 관도를 뒤덮었던 삼수정 그늘을 잠시 그려본다. 푸릇푸릇 자라는 신록을 느끼며 함안대로를 따라 조용히 거닐어 보고싶다. 지금은 사라져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시문이 전하니 그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김세호 경상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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