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창건 이후 기록 없다가
조선시대 다시 여러 문헌 등장
주세붕·신몽삼 등 시에서 찬미
신선 사는 곳으로 비유되기도
현재까지 무릉산서 절경 뽐내

함안 장춘사 전경. /조재영 기자
함안 장춘사 전경. /조재영 기자

장춘사(長春寺)는 함안군 칠북면 무릉산(武陵山)에 있는 사찰이다. 통일신라 815년(헌덕왕 7) 무릉(武陵)이란 승려가 창건했다고 한다. 현재 사찰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과 석탑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면, 창건 유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뿐더러 이후의 내력도 자세하지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과연 장춘사는 아무런 기록 없이 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을까? 유구한 역사가 있으니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만 같다. 

장춘사의 이름은 조선시대 여러 지리지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칠원(漆原)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한 정황이 뚜렷하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칠원의 사찰로 장춘사와 천계사(天溪寺)가 소개되어 있고 모두 무릉산에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계사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장춘사는 여전히 굳건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2 경상도, ‘칠원현’. 불우(佛宇)의 시작에 장춘사의 이름이 보인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사찰로 이름을 올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2 경상도, ‘칠원현’. 불우(佛宇)의 시작에 장춘사의 이름이 보인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사찰로 이름을 올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춘사는 조선 전기부터 칠원의 대표적인 명찰(名刹)로 인식되었다.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시에 단서가 보인다.

十室武陵縣(십실무릉현: 열 가구 사는 무릉현)
孤城障裏開(고성장리개: 외로운 성 둘린 곳에 있다네)
花猶泛源去(화유범원거: 꽃은 도화원에 떠가는 듯하고)
人似避秦來(인사피진래: 사람은 진나라 피해 온 듯하지)
雲碧長春寺(운벽장춘사: 구름은 장춘사에서 푸르고)
天高景釀臺(천고경양대: 하늘은 양대에서 높구나)
世間無此境(세간무차경: 인간 세상 이러한 경지 없기에)
唯有說蓬萊(유유세봉래: 오로지 봉래라고 말하노라)

-주세붕(周世鵬), <무릉잡고별집(武陵雜稿別集)> 권 4, ‘무릉현(武陵縣)’.

주세붕의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등이다. 칠원을 대표하는 학자로 역사에서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해 서원의 시초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이 시는 그가 1532년(중종 27) 부친상을 당해 잠시 벼슬살이를 중단하며 고향에 내려와 지내던 시절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제목은 ‘무릉현(武陵縣)’으로, 무릉현은 조선시대 칠원현(漆原縣)의 다른 이름이다.

주세붕은 무릉현의 모습을 신선 세계에 견주었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 숨어들었던 무릉의 고사를 취한 결과이다. 특히 마지막에 무릉현을 신선 세계의 상징인 봉래에 견주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다만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구절은 경련(頸聯)에 있다. 칠원의 명승으로 장춘사와 경양대(景釀臺)를 손꼽아 거론한 모습이다. 경양대는 지금의 함안군 칠서면 낙동강 변에 있는 절벽으로 여전히 유명하거니와 장춘사의 존재가 경양대와 대를 이루며 칠원의 상징으로 인식된 면모가 뚜렷하다.

이처럼 장춘사는 조선시대 칠원의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회자하였다. 조임도(趙任道)는 1607년(선조 40) 정구(鄭逑) 등을 시위하여 용화산(龍華山)에서 뱃놀이를 즐긴 적이 있다. 이때 계부(季父: 조언(趙堰))에게 올린 시에서 “어제는 장춘사에서 보내고 오늘 밤은 경양대에 있다네”라고 하여 두 공간의 상징적인 의미를 대비시켰다. 17세기 중반 권성오(權省吾)도 칠원 관아에 묵으며 지은 시에서 “백의(白衣)의 승려 장춘사에서 왔고, 은빛 붕어 물고기 경양대에서 왔구나”라고 하였다. 칠원 관아에서 장춘사의 승려를 불러서 경양대에서 잡아 온 물고기로 연회를 즐긴 모양이니, 장춘사의 이름을 경양대와 대비시킨 면모가 명확하다. 주세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춘사와 경양대가 정확한 대구를 이루어 칠원에서 장춘사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바로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장춘사는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칠원의 대표적인 사찰로 회자할 수 있었을까? 신몽삼(辛夢參·1648∼1711)의 시에 장춘사의 모습이 전한다.

暫拂寰中塵(잠불환중진: 잠시 속세의 먼지를 떨쳐내고)
行尋象外春(행심상외춘: 세속 밖으로 봄을 찾아 나섰네)
谷深禽語滑(곡심금어골: 골짜기 깊어 새소리 어지럽고)
樓兀客懷伸(누올객회신: 누대 우뚝해 나그네 회포 푼다)
塔色千年古(탑색천년고: 탑 빛깔 천 년간 오래되었고)
鍾聲半夜新(종성반야신: 종소리 한밤중에도 새롭구나)
僧叉問底向(승차문저향: 승려 다시 어디로 갈지 묻기에)
遙指某江濱(요지모강빈: 그저 멀리 강가를 가리키노라)

-신몽삼(辛夢參), <일암집(一庵集)> 권 1, ‘장춘사에 이르다(到長春寺)].

신몽삼의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성삼(省三), 호는 일암(一庵)이다. 조선 후기 창녕 출신의 학자로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이 시는 그가 장춘사에 이르러 지은 작품으로 직접 장춘사를 보고 감회를 읊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신몽삼은 수련(首聯)에서 봄을 맞아 꽃놀이를 즐기러 장춘사를 찾게 된 과정을 말했다. 잠시 속세의 먼지를 떨쳐내고자 했다는 구절에서 장춘사가 자연의 아취가 가득한 곳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어지는 함련(頷聯)에서는 장춘사에 이르러 자신의 느낌을 고백했다. 새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높은 누대에 올라 회포를 풀어내는 모습이다. 누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자세하지 않지만 아마도 우뚝한 종루와 같은 곳에 올라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련은 장춘사의 정취를 읊은 구절이다. 오래된 탑은 현전하는 오 층 석탑을 말한 것일 테고 한밤중의 종소리가 신선하게 들렸음이 분명하다. 신몽삼은 미련(尾聯)에서 세속과 단절된 지금을 돌아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강가는 강호(江湖)를 상징하니 역시 자연으로 가겠다는 심상을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영남읍지(嶺南邑誌)", ‘칠원’, 187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칠원현 동북쪽 무릉산 아래 장춘사의 이름이 보인다. 조선 후기까지 지속된 장춘사의 역사를 증명한다.
"영남읍지(嶺南邑誌)", ‘칠원’, 187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칠원현 동북쪽 무릉산 아래 장춘사의 이름이 보인다. 조선 후기까지 지속된 장춘사의 역사를 증명한다.

이처럼 장춘사는 무릉산에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명찰로 회자하였다. 특히 칠원의 이칭인 무릉과 어우러져 속세의 티끌이 깃들지 않은 신선 세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장춘사의 가치는 이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조임도가 젊은 시절 학문을 수양한 곳으로 함안의 인재를 배출해 낸 명소로 의미가 깊다. 1935년 안종화(安鍾和)는 11명의 명사와 장춘사를 유람하고 모임을 기념했으니, 야회의 공간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장춘사는 오랜 역사 동안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채 지금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장춘사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글자대로 풀면 장춘은 ‘사시장춘’의 준말로 ‘긴 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장춘사의 봄빛이 아름다워 명명된 이름일까. 봄이란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봄날의 아름다움은 기다린 자만이 누릴 수 있다. 이제 장춘사의 유래를 조금 더 알게 되었으니, 의미가 남다를 것만 같다. 아직 한겨울이지만 언젠가 봄날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그날, 아름다운 장춘사를 꼭 찾아야겠다.

/김세호 경상국립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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