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 봉황동 한 카페에 지난 6일 오후 2시 지역민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시각장애인 지역작가와 만남’이란 행사를 찾아서다.

김기환(80) 시인은 일찌감치 이야기 무대에 자리를 잡았고, 장용식(68) 수필가는 조금 뒤 도착했다. 카페엔 따뜻한 차향이 흐르고, 관객들 눈빛에는 고요함이 교차했다.

행사는 김희자 시낭송가의 시낭송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이원오(국악협회 경남도 지회장) 씨와 장수간(국가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이수자) 씨가 기타와 대금 콜라보 연주를 선사해 분위기가 그윽해졌다.

진행자인 여채원 무장애문화예술동행 두잇나래 대표가 두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각장애인의 삶과 작품 세계가 펼쳐졌다.

여채원 무장애문화예술동행 두잇나래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2시 김해시 봉황동 카페에서 '시각장애인과 지역작가의 만남' 행사를 열었다. 사진 왼쪽부터 장용식 수필가, 김기환 시인, 여채원 대표. /이수경 기자

“시각과 빛을 잃었지만, 글 쓰는 게 내가 가는 길” = 김기환 시인은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 후 한국으로 왔지만 네 살 때 천연두를 앓고 눈을 잃은 채 76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시각과 빛을 잃었으나 내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고, 단풍과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지만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일일학 일일신(日日學 日日新) 매일 배우면서 어느 꽃이 아름다운지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시각장애인연합회 김해지회장을 역임했었고, 여채원 대표와 함께 시각장애인 문화예술 행사 사회자, 흰지팡이마을 방송국 출연, 시낭송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내 고향 진영 본산’, ‘촌사람 생일’ 등에서 고향 진영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또 사계절 변화와 절기마다 떠오르는 영감을 실어 ‘쓸쓸한 한가위’, ‘이별의 계절 가을’, ‘처서’, ‘추석을 앞두고’ 같은 작품을 썼다. 여 대표는 “공간과 철학적 여운이 묻어나는 작품이 다수”라고 평했다.

김 작가는 “김소월 시를 좋아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다른 작가 시 한 편 외우고 헌법 130조 3항(자유와 평등)도 다 외운다”며 “시각장애인은 5감 중 4감으로 지내는데, 말로는 시를 쓰고 귀로는 음악과 문학을 들으며 나를 변화시킨다”고 시 쓰는 즐거움을 밝혔다.

보지 못한 사물을 담아내는 방법으로는 “똑같은 풀이라도 아침이슬 맺혔을 때와 태양에 시들었을 때가 분명 다른 모습일 텐데라며 상상하고, 사계절 모습도 상상하면서 자신의 비애를 담고 서양철학과 심리학도 공부한다”고 말했다.

장용식 수필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열병을 앓고 시력을 거의 잃어 중학교에 못 가다가 집에서 공부해 방송통신대(신학)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2년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농사일 하느라 학업을 중단했고, 형이 농토를 정리하면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그는 “2급 시각장애 탓에 다른 직장엔 못가고 김해에서 아파트 도색(페인트칠) 일을 계속 하다가 한 날 병원 가는 중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현재 왼쪽 눈만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라며 “글을 쓰는 게 지금 내가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장 작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 글을 쓰나 고민하다가 김해소리작은도서관에서 수필을 알게 되고 배워 <수필문학>에 등단까지 하니 자부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못다 핀 꽃 한송이>에 이어 올해 세 번 째 수필집 <지금 내가 가는 길>을 펴냈다. 내년에는 시인 등단 꿈을 실현하고자 시 쓰기에 한창이다.

그는 “하고픈 일을 다 해보지 못하고 활짝 피지 못한 나 자신을 꽃에 비유해 시집을 냈고, 올해는 글을 쓰는 게 오로지 지금 내가 가야할 길이란 생각으로 시집을 펴냈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시각을 잃지 않았던 옛 시절 회상과 장애인 삶 관련 글이 많다. 김해문협 회원은 물론 경남 문화다양성·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도 활동한다.

여채원 무장애문화예술동맹 두잇나래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2시 김해시 봉황동 카페에서 마련한 '시각장애인과 지역작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 관객들. /이수경 기자
여채원 두잇나래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2시 김해시 봉황동 카페에서 마련한 '시각장애인과 지역작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 관객들. /이수경 기자
행사를 마치고 기념촬영하는 시각장애인 작가들과 관객들. /이수경 기자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통합 자리 많아져야” = 김기환 작가는 이번 행사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날 그는 ‘흰지팡이 헌장’ 전문을 모두 외워 소개하면서 매년 10월 15일이 흰지팡이 기념일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 세계시각장애인 지도자들이 모여 사람들 눈에 잘 띄는 흰색 지팡이를 짚어 시각장애인을 알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념일이다.

그는 “늘 도움 받는 생활을 하며 산다. 이분들에게 기쁨을 주려면 긍정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게 많은 이에게 힘이 나게 하는 일이고,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면 행복의 샘이 솟는다”며 “모든 만남은 인연이다. 3년 전 숲속 체험에 참여해서 꾀꼬리같은 목소리에 반해 빛, 공기, 용기가 돼주는 여채원 대표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환한 웃음을 보였다.

장용식 작가는 11월 11일의 의미를 밝혔다. 빼빼로데이가 아니고 시각장애인의 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 문화를 막고자 빼빼로데이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 문화를 쉽게 잘 받아들이는 건 심각한 일이다. 11월 11일은 원래 시각장애인의 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내든 안 내든 활동할 수 있는 한 글을 쓸 거다. 하루라도 시나 수필을 안 쓰면 불안하고, 글을 안 쓰면 시간도 안 간다”면서 “부족한 저를 여러분 앞에 서게 해줘서 한편으론 부끄럽고 용기 줘서 고맙다. 내 눈에 대해 부모나 나 자신을 원망해본 적 없다. 비장애인보다 뜻있게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관객들은 두 작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존경스럽고 부끄러웠으며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자영업을 하는 지역 주민은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 글을 쓰다니 두 작가 작품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평소 불평 불만이 많았는데, 많이 배워야겠고 낮아져야겠다.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수간(대금산조 이수자) 씨는 “많이 배웠고 열심히 살겠다”, 손은숙(김해글로벌청소녀센터 대표) 씨는 “푸짐한 선물을 받아간다”, 김희자(시낭송가) 씨는 “두 분에게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최원호(시인) 씨는 “멀쩡한 눈으로 글 쓰는 걸 미루는데 부끄럽고 죄송하다. 말은 등뼈처럼 단단하게 받쳐주고, 글은 남에게 힘을 주고 내 몸을 지탱해주는 것같다”고 밝혔다.

여채원 대표는 “시각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이 있는 일상 생활 공간으로 나오게 해서 함께 만나게 하고자 이런 행사들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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