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떠오르는 바다가 있다. 가본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눈 덮인 하얀 백사장이 선명한 잔상으로 남아있는 곳. 알 수 없는 끌림에 몬톡 해변으로 내달렸던 조엘처럼, 입김이 서리는 겨울은 매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몬톡 해변의 별장에서 처음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자연스레 연인이 되어 긴 연애를 이어간다. 그러다 점차 갈등만이 일상을 채워나갈 즈음, 쌓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여느 커플처럼 그들도 헤어짐을 맞는다. 이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곳에 찾아가 서로를 기억에서 삭제하기로 한다. 시술을 받으며 시간의 역순으로 기억이 지워지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추억과 하나둘 마주하고 이 기억들만은 지우지 말아주길 간청한다. 하지만 그 외침은 꿈속의 메아리일 뿐, 후회는 힘이 없고 잠들어 있는 몸은 손가락 하나 들 수 없다. 이튿날,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진 조엘은 출근도 내팽개치며 홀린 듯 몬톡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조엘에 대한 기억이 없는 클레멘타인과 마주한다.

영화 한 장면. /갈무리
영화 〈이터널 선샤인〉 한 장면. /갈무리
영화 한 장면. /갈무리
영화 〈이터널 선샤인〉 한 장면. /갈무리

<이터널 선샤인>은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내러티브 위에 '물리적 장치로 기억을 삭제'하는 SF 요소를 가미하면서 조엘이 겪은 실제 상황과 기억(꿈) 속 고군분투를 뒤섞는다. 거기에 시간대마저 뒤죽박죽 섞어 전후가 한 눈에 읽히지 않도록 배치해 두며 조엘의 혼란한 감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시킨다. 하나하나 이해하며 따라가려 하면 길을 잃을 것이고, 그저 흘러가듯 시청각을 스크린에 맡겨둔다면 수미상관의 결말이 주는 감정의 극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이 가진 명성에 비해 실감하는 인기가 적은 건 아마 이 탓일지도 모른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늘 독특한 영상미와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로 수식되지만, 한편으론 난해함과 호불호라는 말로도 설명되곤 한다. 다른 대표작인 <수면의 과학>이나 <무드 인디고>에서는 그 모든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이터널 선샤인>만큼은 공드리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대중적인 기호와도 잘 맞닿아있다.

기억이 지워진 채로 만난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에게 끌림을 느낀다. 머잖아 과거의 일들을 우연히 알게 되지만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아이러니. 기억이 괴로워 사람을 잊었고,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 했다. 하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차라리 기억이 돌아왔으면 하는 처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행복했던 기억은 송두리째 사라진 채 참혹한 미움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면 지금 다시 느끼는 끌림이란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럼에도 이 마음을 믿어보자는 다짐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데려다준다.

오래 만날수록, 서로 잘 알아갈수록 우리는 서로를 왜곡해 가는 게 아닐까 돌이켜본다. 처음 모습과 마지막 모습 중 어떤 게 진짜에 가까울까. 시간에 반비례하지 않는 사랑이란 가능할까. 관성에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을 굴리는 것 같은 사랑 말이다.

"몬톡에서 만나." 기억 삭제 시술의 끝에서, 가장 옛 기억까지 밀려난 그들이 모든 희로애락을 뒤로하고 기억에서마저 헤어지던 작별 인사가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이 영원한 이별의 장면은 평생의 겨울 동안 곱씹게 될 것만 같다.

 /전이섬 작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