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입구 '기후위기' 글씨 쓴 박종권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대표
강지웅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 벌금 10만 원 선고 직후 발언
"재판부도 피고인의 정신·고민 존중"…법정 내 이례적 장면 눈길

"오늘 판결과 별개로 피고인의 정신, 고민하시는 부분들은 저희 재판부에서 존중하고 있다는 점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지웅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부장판사가 선고 내용을 듣고 법정을 떠나려는 피고인에게 건넨 말이다. 피고인은 터널 입구 등에 '기후위기'라는 글자를 적어 재판을 받은 박종권(69)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공동대표였다. 판사가 굳이 피고인을 붙잡고 판결 이외에 발언을 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기후위기 대응 활동을 펼치는 시민사회단체 대표에게 '존중'을 표했고, 재판부 역시 기후위기 심각성을 함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창원지법 마산지원 형사1단독(강지웅 부장판사)은 지난 4일 오전 225호 법정에서 경범죄 처벌법 혐의로 기소된 박 대표에게 벌금 10만 원을 선고했다.

박 대표는 지난해 12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정부 또는 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사회기반시설인 진북터널과 진전터널, 해안도로 등에 붉은색 또는 하얀색 스프레이로 '기후위기'라고 적어 인공구조물을 훼손한 혐의를 받았다. 박 대표는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고, 이번 재판이 진행됐다.

검찰은 박 대표에게 벌금 15만 원을 구형했는데, 선고에서는 벌금 액수가 다소 낮아지긴 했다. 이날 강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기후위기'라는 글씨를 쓴 사실은 있으나 시민들에게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리고 정부와 언론에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 행위라고 주장한다"며 "각 인공구조물에 '기후위기'라는 글씨를 쓴 행위는 피고인의 정치적·사회적 표현의 자유 실현이 목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짚었다.

다만 강 부장판사는 "인공구조물 관리자의 사전 동의나 허락 없이 도로를 통행하는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곳에 쉽사리 지우기 어려운 라카 스프레이로 크게 글씨를 쓴 것은 그 수단이나 방법에서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또 이 같은 행위 이외에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릴 다른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따라서 피고인 행위는 사회 상규에 비춰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므로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벌금 10만 원 선고로 박 대표는 고민 끝에 항소하기로 했다. 벌금형을 받아들이면 '기후위기'를 알린 행동이 위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선고 이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판사의 마음을 이해는 한다. 그리고 조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경찰, 검사, 판사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줬다는 사실에 만족한다"며 "그럼에도 '집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제인 폰다의 말처럼 (기후위기는) 심각하다. 이러한 절박성을 모르는 검찰과 판사의 판결에 승복할 수 없어 항소하려고 한다"고 적었다.

그는 "고등법원 판사에게도 기후위기 심각성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별거 아니지만 대국민 기후위기 홍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헤아려주고 지켜봐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앞서 박 대표는 "정부가 노력하지 않아 부득이 도로 터널 벽면에 기후위기 글씨를 적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라며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앞장서서 기후위기 표시를 해야 할 일인데, 재물손괴 운운하며 경찰서에 신고한 국토관리청은 지구 밖의 존재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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