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경남 ‘밖’ 가야유적 (3) 경북 고령 본관리고분군

지산동고분군 3.5km 거리 위치
5~6세기 관동마을 일대 조성
500기 이상 대규모 고분군

원통 모양 그릇받침 등 출토
성주 방면 방어 역할담당 추측
군 "추가 발굴 후 사적지정 추진"

고령 본관리고분군 36호분 전경. /대가야박물관
고령 본관리고분군 36호분 전경. /대가야박물관

경북 고령 대가야는 가야 맹주였다. 반로국이라는 이름의 삼한시대(기원 전후 1~3세기) 변한 소국에서 시작해 후기 가야를 대표하는 영광의 나라가 됐다. 김해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시대 때 큰 가야였다면, 고령 대가야는 후기 가야 때 큰 가야로 군림했다. 그들을 맹주로 만든 건 교역이었다. 대가야계 여러 토기와 철기들은 낙동강을 거쳐 유통됐고, 금관가야 쇠락 이후 주도권을 잡은 대가야는 한반도 남부지역 가야 문화권, 중국, 일본 등과 다양한 유물을 주고받으며 성장했다.

1500년 전 대가야 터전이던 고령에는 가야 문화유산과 전승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절차를 밟고 있는 지산동고분군이 있다. 대가야 최상위 지배계층 무덤(700여 기)이다. 왕과 왕족, 고위 귀족층을 포함해 관료나 병사, 기술자 등 왕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묻혀있다. 여기서는 대규모 순장 무덤이 발견됐다.

가야시대 왕릉급 무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무덤 유적(40여 개)들이 대가야 중심부인 대가야읍 안팎에 퍼져있다. 지산동고분군과 불과 3.5㎞ 거리에 있는 본관리고분군은 대표적인 독립집단 고분군 중 하나로, 성주군에서 대가천을 타고 내려오는 신라 세력을 막기 위한 방어선(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본관리옥산성)을 조정하고 지휘할 수 있는 곳에 입지하고 있다. 5~6세기 무렵 본관리에 있는 관동마을을 둘러싼 야산에 조성된 이 유적은 마을 서쪽 능선 용수봉(227m) 정상에서 북동쪽 소가천 방향으로 뻗어 내린 가지능선(해발 50~240m 내외) 정선부와 북동쪽 산비탈 일대에 분포한다.

고령 본관리고분군 34호분 전경. /대가야박물관
고령 본관리고분군 34호분 전경. /대가야박물관

봉토분 62기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됐다. 대형분은 능선 정상부에, 중형분은 정선부, 소형분은 산비탈 일대에 조영돼있다. 고분군 분포범위나 무덤 밀집도를 고려하면 적어도 500기 이상의 무덤이 이루어진 대규모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지산동고분군을 제외하면 고령에서 무덤 지름도 가장 넓다. 지름은 10~20m 내외다.

본관리고분군이 있는 같은 산등성이에는 후암리고분군이 있고, 말단부에는 쾌빈리고분군이 분포한다. 본관리고분군과 후암리고분군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보고돼 있지만, 같은 능선에 연결되는 고분군이므로 하나의 무덤 유적으로 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일대에 있는 3개 유적 고분 수를 모두 합하면 1000여 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본관리고분군 규모는 85만 9276㎡다. 무덤 양식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이다. 돌을 깨어 직사각형 구조의 장방형이나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세장방형 덧널을 만들고 그 안에 부장품(껴묻거리)과 주검을 안치하는 방식이다. 이 유적에서는 장방형과 세장방형 구조가 모두 확인됐다. 으뜸돌방과 순장 덧널이 나란히 배치돼있는 형태다.

본관리고분군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77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에 소개되면서다. 이후 발굴조사는 두 차례 진행됐다. 1983년 계명대 행소박물관이 대형 봉토분 34~36호분과 돌덧널무덤 9기를, 2019년 대동문화재연구원이 훼손 지역 내 돌덧널무덤 10기를 조사해 유적 성격과 규모, 조성 시기 등을 일부 밝혀냈다. 본관리고분군 중심연대는 6세기 전반, 전반적인 무덤 양식과 부장품은 지산동고분군과 비슷한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을 이루는 것으로 조사기관들은 평가했다.ㄱ

고령 본관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원통 모양 그릇받침. /대가야박물관
본관리고분굴 토기 유물. /대가야박물관

대가야시대 최고 지배층 무덤 속에서만 출토되는 원통 모양 그릇받침이 본관리고분군에서 출토됐다. 도굴 규모가 커 출토 유물이 많지 않았으나 일부 남아 있던 토기와 철기들은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이 주류였다. 신라식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 성주식 귀 달린 항아리, 대가야 지역에서 보기 드문 연질 바닥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토기(연질첨저토기)도 나왔다. 특히 갑옷과 투구, 고리자루칼 등 많은 양의 무기가 확인됐다. 이를 볼 때 본관리에 머물던 가야 세력은 대가야 중심부 차상위 지배층으로, 성주 방면 방어 성격과 교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본관리 일대에는 왕도 중심 세력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장은 “지산동고분군이 최상위급 무덤 유적이라면, 그다음 차상위급 무덤 유적은 본관리고분군”이라며 “고령의 가야사를 밝혀내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정 관장은 “고령 요충지에 해당하는 장소에 본관리고분군이 있다”면서 “무덤 수백 기가 분포하는 곳이지만, 대가야 중심 왕도 위주로 연구가 이뤄지다 보니 조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지산동고분군 성격은 아는데 그다음 집단 성격은 모르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며 “세력의 전체적인 성격이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만큼 추가 발굴조사를 벌여 유적 성격 규명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령 본관리고분군 전경. 관동마을을 둘러싼 야산에 지름 20m 넘는 가야시대 무덤이 솟아있다. 고분 위로 나무가 무성하다. 곳곳에 도굴 흔적이 가득하다. 무덤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다. /최석환 기자
본관리고분군 무덤 숫자를 나타내는 푯말이 땅에 박혀있다. /최석환 기자

지난 23일 오후 정 관장과 함께 찾은 본관리고분군은 훼손 규모가 컸다. 무덤 위로 수풀과 잡목이 솟아 있었으며, 고분 정중앙으로 사람들이 오가면서 생긴 길이 나 있는 상태였다. 지름 20m가 넘는 무덤을 비롯해 소형 무덤 모두 관리되지 않고 방치돼 있었다. 무덤 돌이 바깥으로 노출돼 있거나, 도굴 여파로 곳곳이 움푹 파여 둥그렇게 구멍이 난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본관리고분군에서 도굴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주민(78)은 “산봉우리마다 돌무덤이 있는데 외지인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땅을 파고 안에 들어가서 도굴을 자주 했다”며 “비율을 놓고 보면 외지인보다 관동마을 주민들이 도굴을 더 많이 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관동마을이 고향이라고 밝힌 이흥식(87) 씨는 “화로를 가져와서 불을 피워놓고 밤에 도굴해가던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많이 봤다”며 “옥구슬로 만들어진 목걸이나 토기 등 희한한 유물들이 무덤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걸 꺼내서 한 개에 500~5000원씩 주고 팔아넘긴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어 “20년 전까지 도굴꾼들이 있었다”며 “지금도 산에 가서 땅을 파면 유물들이 나올 건데 군청에서 문화재를 잘 관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장이 23일 오후 고령 본관리고분군이 있는 야산에 올라 유적 안내를 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고령군은 비지정문화재인 본관리고분군의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보고 이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내년에는 추가 발굴조사와 학술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박일찬 고령군청 문화유산과 학예연구사는 “경북도가 2021년 8월 문화재청에 사적 신청을 한 상태다”라며 “하지만, 지난 5월 현지 조사를 나온 문화재위원들이 학술 가치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어 현재 사적 신청 절차가 보류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년에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한 뒤 보존방안까지 수립해서 추후 사적 신청을 다시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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