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2주년 / 분단의 피해자 납북귀환어부 (상) 피해자 김용태 씨 이야기

용돈 벌려 탄 배 태풍에 휩쓸려 북한경비정에 피랍 1년간 억류
귀환 후 간첩으로 몰려 징역형... 13년 후 다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에 거짓 자백 14년 옥살이... 가족과 연 끊기고 아들도 잃어
국보법 재심서 무죄·누명 벗고 반공법·수산업법 재심 기다려

어부들은 분단 이후 동해안, 서해안 어로한계선(과거 어로저지선)을 지키며 생계를 위해 오징어, 명태 등을 잡았습니다. 1960∼1970년대에는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돌아와서 불법 수사, 고문으로 국가보안법,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가족들은 연좌제 고통까지 겪었습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는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배를 탔다가 간첩으로 몰려서 삶은 송두리째 뽑혔습니다. <경남도민일보>는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아 분단 피해자들의 기구한 사연, 진실 규명 작업 등을 알리고자 합니다.

함안에 사는 김용태(65) 씨는 51년 전 납북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그는 14살에 불과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살았으며 4남 2녀 중 다섯째였다. 1971년 9월 둘째 누나 집에 놀러 갔다가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 돈벌이를 해보고자 한 일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해 주문진항에서 대복호에 탔어요. 매형이 선장이라 그 나이에 배를 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태풍을 만났어요. 배가 어로저지선까지 밀려갔죠. 태풍이 오니까 우리 쪽 경비정은 다 들어가고, 북한 경비정이 나타나서 우리 배를 납치해갔습니다."

▲ 납북귀환어부 김용태 씨가 함안군 가야읍 집에서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납북귀환어부 김용태 씨가 함안군 가야읍 집에서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순식간에 납북된 대복호 선원 20여 명은 1년 가까이 잡혀 있었다. 북한에서 먼저 납북된 다른 배 어부들도 만났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이뤄지고,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억류됐던 어선 7척 어부 160여 명이 풀려났다. 그리웠던 고향에 돌아왔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속초항으로 귀환할 때만 해도 가족들을 바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를 속초시청 회의실에 모아놨다가, 다시 시청 인근 여인숙에 따로 불러요. 불려가니 수사관들이 두들겨 패더라고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묻기에 거기서 받은 교육을 자세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북한 지령을 받았다고 조작됐어요."

중앙정보부, 한미 합동수사본부까지 가서 구속 영장도 없이 40여 일간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를 받았다.

끝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다시 되풀이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후 결혼을 하고 어린 아들 하나도 두고, 마산에서 건축 공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3년 지난 1984년 4월(당시 27세) 낯선 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마산동부경찰서에서 왔다며 차에 타라고 했다. 옆구리에 권총까지 들이댔다.

"그 사람들이 경찰은 아니고, 강릉검찰청에서 나왔다고 했어요. 예비군 교육을 안 받아서 나왔다는 말을 하는데…. 가족에게 연락도 못 하게 했습니다. 자꾸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나중에는 때려서 기절까지 시켰어요. 정신 차려보니 군부대더라고요."

김 씨가 끌려간 곳은 강릉 호남동에 있는 보안사 영동분실. 거기서 34일간 고문을 받았다. 전기 고문, 고춧가루 고문,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고문까지.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손톱이 떨어져 나가고, 이가 몽땅 부러졌다. 지금은 치아 하나를 빼고 다 임플란트를 한 상태다. 어깨 인대도 파열돼 수술을 받았다.

짜 맞춘 틀에 맞게 답변하지 않으면 고문은 계속됐다. "나 하나 죽는 건 괜찮은데, 가족까지 고문한다고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는 그는 초·중학생 조카까지 들먹이는 고문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시키는 대로 누군가가 이미 써둔 기록을 베껴 썼다. 그러다 보니 조서를 쓴 다른 사람 이름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적을 정도였다.

"시키는 대로 베껴 썼지만, 다시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검사에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수사관에게 되돌아간 거예요. 초주검이 될 때까지 맞고, 재판까지 갔습니다. 1심 선고 후에 가족들이 어렵게 돈을 마련해 항소한다고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변호사는 몇 가지는 시인하고, 동정을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망연자실했습니다. 억울하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생각했지요."

항소심 재판부에서 판사는 이례적으로 집무실에서 비공개 재판을 열었다. 김 씨가 울면서 최후 진술을 마치자, 판사는 '간첩 행위를 한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1심에서 시인을 한 게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판결문에 나온 공소 사실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 간첩 행위로 둔갑했다. 간첩 활동으로 열거한 부분은 이렇다.

"(창원기계공단 입구 검문소에 대해) '△이 검문소는 창원시 양곡동에 있는 신촌검문소이다 △검문소는 마산시에서 창원시 쪽으로 가다 우측에 위치한다 △검문소 건물은 시멘트 블록으로 건축하였고 슬래브 지붕이다 △검문소에는 전투 경찰 2명이 엠-16소총으로 무장하고 위 수출공단으로 출입하는 차량을 검문 검색한다'라는 등의 국가 기간산업시설의 경계 상태에 관한 기밀을 탐지 수집함으로써 북한을 위하여 간첩한 것이다."

김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가족마저 등을 돌렸다. 아버지는 '높으신 검사, 판사가 거짓말할 리가 없다'며 오히려 '아들을 살려두지 말고 사형시키라'고 교도소장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쳤고, 미장기능사, 건축목공기능사, 조적기능사 등 자격증 6개를 땄다. 대학수학능력평가 공부까지 해서 복역 후에는 광주 한 대학 건축공학과에 합격해 공부를 하고, 건축기사 1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1997년(당시 40세) 출소 후 다시 삶이 열리는 듯했지만, 시련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광주에서 건축 일을 하는데, 아들이 20살이 돼서 찾아왔다. 부인과는 교도소 복역 중 이혼했다. 아들은 사흘간 아버지와 함께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날 '이제 우리 인연을 끊자'고 선언했다. 아버지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픈 마음을 감싸 안고 헤어졌는데, 4년 뒤 다른 사람에게서 아들 소식을 들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고 한 달 뒤 한강에 투신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경찰이 되려던 아들은 경찰대 필기시험을 통과했지만, 연좌제 탓에 최종합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씨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 김용태 씨가 집 근처 고추밭에서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김용태 씨가 집 근처 고추밭에서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그러다 납북귀환 이후 두 번째로 끌려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1984년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2008년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신청하려고 2008년부터 강릉검찰청에 내 사건 기록을 달라고 하니, 계속 없다고 하는 거예요. 사건 기록 보존 연한을 물어보니 '영구 보존'이라는데…. 틈만 나면 연락했어요. 2011년에 마침 임시직 직원이 점심때 우연히 연락을 받아서 그 문서가 있다고 한 겁니다. 바로 강릉지청으로 갔지요."

마침내 그는 2014년 무죄 선고를 받았다. 30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판사가 당시 법관을 대신해 사과했다. 지금은 처음 납북됐을 당시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건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2018년 재심을 청구해 개시를 앞두고 있다.

김 씨는 명예회복 과정이 쉽지 않지만, 같은 고초를 겪은 이들에게 함께 용기를 내자고 북돋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을 말할 때 진실은 밝혀집니다. 국가기관에서 일했던 이들이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줬으면 합니다. 숨긴다고 끝까지 숨겨질 게 아닙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은 분들에게는 지금도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숨기지 말고 함께 나서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귀화 기자 wookiza@idomin.com

 

◇김용태 씨 삶

△1957년 5월 20일 출생
△1971년 9월 21일 = 주문진항 대복호 승선, 오징어잡이 선원 생활, 9월 26일 북한경비정에 피랍
△1972년 9월 6일 = 속초항으로 귀환, 12월 14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반공법·수산업법 위반 혐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
△1984년 4월 13일 = 보안사 연행, 5월 16일까지 34일간 보안사 분실에서 조사
△1985년 1월 6일 =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4년 선고
△1997년 = 광주교도소 복역하다 출소
△2011년 = 서울고등법원에 국가보안법 위반 건 재심 신청
△2014년 1월 10일 = 서울고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무죄 선고, 6월 26일 대법원 확정
△2019년∼현재 = 반공법·수산업법 위반 건 재심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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