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영화' 시장에도 유행이 있다. 유행은 주로 예술영화극장에서 진행되는 감독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최근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스페인), 하마구치 류스케(일본) 감독전이 전국 곳곳의 작은 영화관에서 열렸다. 그 직전에는 크리스티안 펫졸드(독일) 감독전 열풍이 있었다. 2020년 <트랜짓>을 정식 개봉하고, 이후에 그의 전작들을 역순으로 재개봉하는 기염을 토했다.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재개봉작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피닉스>에 관해 써보려 한다.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은 특히 전쟁 '직후' 상황을 영화로 만든다. 그 이유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넬리
전쟁 상처로 얼굴 성형 감행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전쟁이 끝난 직후 유대인이 겪는 혼란을 어떻게 영화에 담느냐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피닉스>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주인공 넬리가 남편 조니를 찾는 이야기다. 넬리는 수용소에서 크게 다친 얼굴을 성형해 얼굴이 바뀐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이런 전개를 담담하고 건조하게 담는다. 인물들의 표정부터 크게 변화가 없다. 극 전개에서 뚜렷한 설명을 곁들이지도 않는다. 이름과 얼굴, 시간이 어긋난 설정을 안고 있는 영화는 설명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이미지만을 연이어 보여줄 뿐이다.

▲ 영화 <피닉스> 속 장면들.  /갈무리
▲ 영화 <피닉스> 속 장면들. /갈무리

건조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을 잡고 키스하고 난처한 얼굴에도 분명 감정이 있으며, 인물의 지나간 시간마저 얼굴에서 드러난다. 묵직한 음악은 영화의 빈곳을 꽉 채우며 진중한 감정과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외면화된 표현 방식과 내면화된 방식은 단단하게 결합해 풍부해진다. 그의 작품 <바바라>와 <트랜짓>에서도 마찬가지다. 건조하게 표현하지만, 격정적인 사건을 유려하고 안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감정은 <피닉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피닉스>와 위의 두 작품을 포함한 '크리스티안 펫졸드 3부작'의 재미는 셀 수 없이 많다. 돈과 자전거, 피, 총 등의 의미심장한 소품과 점프 컷의 연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눈높이 맞추는 카메라의 위치 등이 그렇다. 이러한 연출의 특별함에도 감독이 직접 언급한 '억압된 시대의 사랑 3부작'이라는 말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전후 상황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와 직접적으로 닿아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직후 담담히 연출
감독 특유의 건조함 돋보여
독일 '재건' 이중성 시사해

영화 초중반 성형수술을 앞둔 넬리에게 친구인 레네는 '재건'이라는 말실수를 한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하필이면 전후 폐허가 된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재건은 이중적으로 종전 직후의 회복을 뜻하게 된다.

우리는 세계가 나치 악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혹은 완전한 과거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한다. 독일이 종전 후 반성의 태도를 보인다는 식의 뉴스를 반복적으로 들었고, 그것을 별다른 의심 없이 수용했던 나를 보면 더욱 그렇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종전 직후와 2010년대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여전히 재건 중이고 재건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미디어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이다.

이런 전시 상황에서 '재건'이라는 단어는 아직 멀어 보인다. <피닉스>에서 '재건'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마음에 남는 이유다. 영화가 현실을 재건할 수는 없다. 영화를 벗어나 단순한 명제에 닿게 된다. 전쟁은 참혹하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피닉스>를 비롯한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를 통해 조금 더 선명하게 희망할 수 있다.

/김준희 마산영화구락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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