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 저자, 전쟁 성폭력 고발
"여성은 그저 역사 방관자가 아냐"

스물두 살 나이마는 열여덟 살 때 ISIS(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에 붙잡혀 갔다. 남자들은 제비뽑기로 나이마를 성 노예로 삼았다. 12명에게 "염소처럼 팔려 다닌" 나이마는 그들 이름을 모두 기억했다. 죗값을 치르게 하리라 다짐하며.

<관통당한 몸>은 '전시 강간'에 관해 쓴 책이다. 저자는 1980년대 후반부터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중동·아프리카·유럽·동남아시아·남아메리카 등 대륙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전쟁 참상을 보도해왔다.

'여성의 몸, 전장이 되다'는 제목으로 쓴 첫머리에서 저자는 "최악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이마 같은 누군가를 만난다"고 털어놨다. 나이마는 야디지족이다. ISIS는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야디지 처녀들을 산 채로 불태웠다. 저자가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또 다른 야디지 소녀의 언니가 그렇게 숨졌다.

저자는 "오늘날 많은 분쟁지역에서는 분명 여자인 것이 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1998년에 이르러서야 강간이 전쟁범죄로 처음 처벌됐다는 사실에 충격 받는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잔학행위를 점점 더 많이 마주치는 상황에 화가 났다. 하지만 전쟁 보도에서 여성 목소리는 빠질 때가 너무 많았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다.

2008년 6월 19일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강간과 기타 형태의 성폭력은 전쟁범죄,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 또는 제노사이드 구성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라고 규정한 '전시 성폭력에 대한 1820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는 설립 후 21년 동안 전시 강간에 유죄 판결을 한 건도 내리지 않았다. 이런 범죄는 특성상 목격자가 없거나 직접적인 명령이 문서로 남아있지 않을 때가 많고, 피해자가 입증 또는 증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느린 살인'이라고 불리는 강간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만연한다. 전쟁에서 강간은 무기가 된다. 그 이유는 "국제사회와 각국 법정이 가해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일깨운다.

책은 말하기도 듣기도 쉽지 않은, 전시 강간 피해 여성들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들려준다. "여성은 그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다. 이제 이야기의 절반만 말하기를 멈춰야 할 시간이다."

일본군 위안부·ISIS 성 노예 등
피해자 목소리·참혹한 실태 담아
고 김복동 할머니 증언도 실어

15편 가운데 마지막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인된 성폭력과 인신매매 시스템에 따라 성 노예로 감금했던 '위안부' 이야기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는 80대 후반의 나르시사와 에스텔리타 할머니를 소개한다.

▲ 김복동 할머니가 2014년 3월 19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18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복동 할머니가 2014년 3월 19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118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책에는 양산 출신으로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는 최초로 유엔인권위원회에 파견돼 성 노예 사실을 증언한 고 김복동(1926~2019) 할머니 증언 영상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문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여성들도 이런 일이 자신에게 결코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꼬집는다. 이어 "분쟁지역 성폭력은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라며 "침묵을 지키는 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 괜찮다고 말하는 일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저자가 2019년에 쓴 책은 2년여 지난 올해 3월 국내에서 번역돼 발간됐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도 2개월여 지난 현재 '전시 강간'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여성과 아동뿐 아니라 남성 피해 폭로도 쏟아진다. 유엔은 성범죄를 비롯해 집단학살 등 전쟁범죄 증거들을 수집·확인하며 러시아를 규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회의원인 키라 루딕은 지난달 JTBC와 인터뷰에서 "나치 수장들이 재판정에 서는 건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뤄졌다"며 "푸틴도, 그의 정권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21세기에 전쟁이라니 터무니없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이마가 죗값을 치르게 가해자들 이름을 기억하듯, 변화를 위해 침묵을 깨는 용감한 영웅들이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나올 것이다.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한겨레출판사. 494쪽. 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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