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등급 판정 오류로
기본권 박탈당한 '재기'
사회라는 심판과 싸워야

<복지식당>의 주제는 분명하다. 장애인 인권 존중이다. 나아가서는 세상에 더 세심한 배려다.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는 장단이 있지만, 현재의 세태를 생각하면 장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둘러싼 논의들이 뜨거운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건강마음센터에서 인지치료를 받고 있다. 사람이 어떤 안 좋은 상황에 마주하면 자동으로 부정적 사고를 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이를 긍정적이고 올바른 사고로 바꾸는 게 인지치료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동권 투쟁을 단지 출근과 등교를 방해하는 빌런(악당)으로만 느끼기 쉽다. 바쁜 사회 속에서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마음 깊이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사고하여 그들 투쟁의 근간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장애가 없다는 것이 특권이 아님을 알고. 결국 장애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투쟁에 대해 아니꼬운 생각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식당>은 장애인 권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계기가 된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고의 확장과 올바름을 유도하는 것이다.

▲ '중증 장애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주인공의 사투를 담은 영화 <복지식당>의 한 장면. 오른쪽 아래 사진은 주인공 '재기' 모습.  /스틸컷
▲ '중증 장애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주인공의 사투를 담은 영화 〈복지식당〉의 한 장면. /스틸컷
 영화 〈복지식당〉 주인공 '재기' 모습. /스틸컷

당연한 요구이자 권리지만
왜곡·혐오 프레임 덧씌운
지하철 이동권 투쟁 오버랩

<복지식당>에서 장애인 커뮤니티와 그들의 삶을 가깝게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허술한 시스템을 본다. 이 허술함은 장애인 커뮤니티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들에게 이 허술함의 결과는 비장애인에 비해 더욱 참혹하게 온다. 누가 봐도 중증장애인인 '재기'는 어이없는 진단으로 누려야 할 복지를 누리지 못하며, 이는 재기의 삶에 직격탄을 던진다. 오류 하나가 사람 하나의 이동권을 박탈한 셈이다. <복지식당>을 보면 나쁜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장애인 콜택시를 타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편하겠다',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며, 장애인 복지사업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수당을 받는 행태를 보면 샘이 난다. 이 마음의 한편에는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는 것에 대한 불만이 숨어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나은 혜택을 받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이다. 이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보며 튀어나오는 부정적 사고와 닮았다. 하지만 부정적 사고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따져 드는 일은 크게 의미가 없다. 대신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며 자각하고 더 넓고 깊은 사고를 해야 한다.

영화의 서사는 재기가 괴롭힘을 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통받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이 지점에서 <복지식당>에 단순히 고통을 전시하는 영화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복지식당>의 서사는 일종의 고통전시가 맞지만, 단순한 포르노는 아니다. 고통이 주인공 '재기'를 세상에 스스로 서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엔딩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 당하기만 하던 재기는 결국 홀로 심판대에 서서 자신의 처지를 자신의 입으로 발화한다. 허술한 시스템과 그에 따른 본인(장애인)의 어려움을 또박또박 말한다. 사회로 대변되는 심판자와 혼자서 마주한 모습은 (두려움이 만든) 당당함으로 보인다. 영화는 곧 끝나지만 재기가 중증장애인 자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재기는 당연한 권리를 쟁취했을 것이다. 영화 내내 고통받는 재기의 모습을 삼키려면 그런 결과를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믿고 지지하며 나아질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는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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