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정, 대학생 때 투병에도 좌절 안해…장애여성 인권운동에 앞장
문숙현, 사회 편견·차별 스스로 극복…경남여성장애인연대 출범 주축

◇경남여성장애인연대 서혜정 대표

경남여성장애인연대(이하 경남여장연) 서혜정 대표의 60 생애는 20년을 주기로 세 차례의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스무 살까지는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주위의 사랑을 받고 자란 딸이었다. 마지막 선발시험 세대로 마산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문학동아리 고교 연합 모임을 이끌고 앞장서기 좋아하는 재기 발랄한 소녀였다. 예비고사를 친 뒤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도저히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형편이 됐지만 고집을 부려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숙명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1년 11월의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손에 이상을 느꼈다. 일시적 현상이라 가볍게 여겼는데 증세는 계속됐고, 어머니의 권유로 혈액검사를 받은 결과 류머티즘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이상 증상은 차례로 온몸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학업을 포기하기 싫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프기 전 41㎏이었던 몸무게는 27㎏까지 줄었고 몸만큼이나 주변의 호기심에 찬 시선과 관심이 따갑고 아팠다. 몸이 급격히 나빠져 휴학을 하고 죽은 듯이 시간을 보내던 1982년 가을에 마당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다가 문득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일었다.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맨발로 땅을 디뎠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1983년에는 복학을 해 학업을 마쳤다. 학자나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일찌감치 접고 2000년까지 학생 과외로 밥벌이를 하면서 지냈다. 그 사이에 아버지의 죽음, 인공관절 삽입 수술 등 여러 차례의 수술과 시술을 견뎌야 했고 급기야 목발을 짚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서혜정 경남여성장애인연대 대표.  /윤은주 시민기자
▲ 서혜정 경남여성장애인연대 대표. /윤은주 시민기자

하지만, 닥쳐온 불행을 그는 스스로 놀라울 만큼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불치라는 류머티즘 관절염도, 목발을 짚어야 하는 상황도 수용하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서 20여 년을 두문불출 암흑 속에 웅크리고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했다.

2005년 그의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오빠의 권유로 경남종합복지관을 찾고 아자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소개받아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엔 단순 봉사로 시작했는데 장애인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을 수료하고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중증 장애에도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자신을 스스로 조금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데서 한 걸음 나갔다.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생의 3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2007년 3월부터 지적 장애 여성들을 위한 야학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40만 원 월급의 비정규직이었지만 지적 장애 여성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무려 7개월여에 걸쳐 알파벳을 겨우 익힌 수강생들이 'orange'란 단어의 철자를 정확히 맞혔던 때의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서혜정 대표의 활동 모습.
▲ 서혜정 대표의 활동 모습.

이후 2008년 1월부터 정규직으로 사무국에서 조직 담당자로 일하게 됐다. 영상 축제 개최, 마창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조사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토론회 개최, 이미지메이킹 축제, 여성장애인 몸 사진전 등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장애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다.

한 번의 낙선 끝에 2016년 여장연의 대표가 돼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그동안 그의 존재 의미가 돼 준 경남여장연이기에 비록 박봉이라도 대표직을 흔쾌히 수행하고 있다. 이렇게 활동하다 보니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여성장애인은 여성과 장애라는 다중적 차별 상황에 놓여 있다. 2017년 기준 그들의 학력은 70%가 중졸 이하이다. 15년 전에 제기했던 여성장애인 문제들을 지금도 외쳐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하지만, 장애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인정받고자 멈추지 않고 천천히 걷다 보면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친구로 받아줄 날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반지 낀 자신의 손을 보고 그나마 온전한 손가락 두 개만이라도 지켜달라 빌던 친구의 기도는 이미 불가능해졌지만 역방향 인생의 뚝심으로 최소한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주변의 여성장애인들과 함께 잡은 연대의 손을 놓지 않을 예정이다.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문숙현 대표

1968년 3월에 태어난 아기는 생후 3개월에 고관절 탈구라는 진단을 받아 깁스의 족쇄에 묶였다. 한창 자라야 하는 시기에 1년여 깁스를 하는 동안 아기의 신체는 제 기능을 못하고 영구 장애를 입게 됐다.

부모님은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딸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 여기셨다.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혼자서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섯 살 때 장난감 피아노를 선물 받고 혼자서 원리를 깨쳐 연주하는 딸을 본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을 하는 지인에게 딸의 교육을 부탁했다. 늘 배움에 목말랐던 그였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엄청난 속도로 피아노 연주 실력이 늘었다. 열다섯 살 무렵 집으로 놀러 온 동네 아이들에게 재미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피아노 레슨으로 연결됐다. 무엇이든 꼼꼼하게 해내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강습은 인기가 높았다.

▲ 문숙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윤은주 시민기자
▲ 문숙현 경남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윤은주 시민기자

1992년 무렵, 의대에 재학 중이던 남동생이 지도교수에게 누나의 사연을 이야기해서 정밀검사를 받고 원인이 척수 손상일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장애 원인을 알았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가슴속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됐다. 그 무렵 다리를 쓰지 않고 운전할 방법이 있음을 알고 장애인 운전 교습 모임에서 열심히 배워 운전면허를 땄다. 스스로 이동이 자유로워진 그의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텔레비전에서 검정고시학원의 광고를 보고 바로 찾아갔다. 그러곤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단계별로 검정고시를 거쳤다. 지금껏 모르던 세상을 알면서 바쁜 생활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당시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3층에 휠체어와 함께 사람 손에 들려서 올라갔지만 그런 불편도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꺾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고졸 시험까지 합격하고 유아 교사 자격증을 목표로 방송대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때 담당 사무원이 장애인이 어떻게 몸을 많이 쓰는 유아교육을 하겠느냐고 다른 과를 권유했지만 강단 있게 공부해냈다. 재학 시절에는 곳곳에서 휠체어가 거치적거린다는 눈총을 받고 심지어 졸업할 때는 1급 장애인에게 이 자격증을 주는 것이 옳은지 회의까지 열렸다고 한다. 세상 곳곳이 암초요, 지뢰밭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시련을 거듭할수록 그는 더 단단해져 갔다. 방송대를 졸업하고 사이버대에서 사회복지학을 다시 공부했고 다양한 자격증도 땄다. 1994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장애인 5∼6명이 함께 모임을 결성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 특히 여성장애인을 보는 시선은 편견과 차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맥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출범시키고 10년을 활동했다. 상근 제의를 받고 2003년, 운영하던 피아노학원의 연말 발표회를 끝으로 장애 활동가로 나섰다.

▲ 문숙현 대표 활동 모습.
▲ 문숙현 대표 활동 모습.

비록 휠체어에 묶인 몸이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증상도 말끔히 나았고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일한다는 보람도 컸다. 아자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경남여성장애인연대 대표 활동을 마치고 한국장애인인권포럼 경남지부를 설립했다. 이 단체에서는 주로 장애인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장애인식 강사를 양성하는 일을 한다. 장애인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우수 의원에게 상을 주고 장애인 활동 보조인을 위한 제도 개선에도 힘썼다. 장애 인식을 바꾸고 명확한 데이터로 당당히 권리를 요구했다. 또한, 장애인을 강사로 양성해 학교 등 기관에 파견하며 비장애인들의 생각을 바꾸어 왔다. 정당의 도당 장애인위원장, 경남인권위원회 위원, 아름다운가게 자산점 운영위원장 등을 맡아 사회 속에서 공적 기능도 수행했다.

"왜 너는 너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어느 교육장에서 받았던 이 질문에 그는 장애인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되돌아보았다. 이때부터 스스로 쌓았던 단단한 옹벽을 허물고 진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서울에서 집단 동료 상담을 교육받을 때 마음속 응어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평생 품었던 한이 반은 풀린 느낌이었다. 그때의 자신처럼 마음속에 응어리를 얹고 사는 여성장애인들을 세상으로 이끌고 비장애인과 속도를 맞추어 함께 걷는 일에 남은 시간을 쓸 예정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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