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작품에 대해 고찰하는 연주자
그 겸손이 고전 독해력과 깊이 이끌어

"항상 궁금했어요. 그 뒤에 뭐가 있는지가. 슈만이 가장 힘들 때였고, 자신이 정신병원으로 향해 가던 때였기 때문에 그 심리가 표현되었는지,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지, 또한 표현할 수 있는지…."

지난 15일 오후,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슈만 리사이틀이 있었다. 백건우는 리스트, 슈베르트, 베토벤, 쇼팽에 이어 올해의 슈만에 이르기까지 매번 한 작곡가를 파고들면서 그들의 세계를 조망해주었다.

위의 글은 슈만 음반을 녹음하면서 백건우가 한 말이다. 나는 저 말을 듣고 곧바로 철학자 칸트를 떠올렸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해 고찰하면서 그 유명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리고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칸트의 거대한 철학 체계는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했다.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백건우 역시 자신이 연주할 슈만에 대해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슈만은 정말 무엇을 생각했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설령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쉽게 '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몇 가지 말로 그 사람을 규정해버린다. 슈만의 예를 들자면 "트로이메라이를 작곡했어" "클라라와 결혼했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지" 정도 되겠다. 그 정도면 슈만을 아는 걸까?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은 낭만주의 시대의 독일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다. 멘델스존, 쇼팽, 리스트 같은 사람이 슈만과 한두 살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슈만의 음악은 그들과 비교해 대중적이지 않았다. 멘델스존처럼 구조적인 짜임새가 명쾌하지 않았고, 쇼팽처럼 듣자마자 빠져들게끔 나긋나긋하지도 않았으며, 리스트처럼 화려하고 외향적이지도 않았다.

슈만의 음악은 대중보다는 자신을 겨냥한 자전적 고백이었다. 게다가 온갖 문학적 판타지로 뒤덮여 있어 음향만으로는 맥락을 짚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슈만의 곡은 어렵다. 특히 클래식 입문자들에겐 '깊고 어두운 우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마치 이렇게 될 것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 슈만은 <젊은 예술가를 위한 조언>에서 이렇게 말해두었다. "한번 듣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처음 만났을 때 끌리는 것이 항상 최상은 아닙니다. 대가들의 작품은 연구가 필요한 법입니다. 당신이 더 나이 들 때까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슈만은 우리가 고전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조언해준 것이다. 나는 '고전의 힘'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오랫동안 우리 곁에 살아남은 저작들은 그만한 힘을 내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내용을 알든 모르든, 그 점에 대해선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고전을 존중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겸손함을 동반한다. 나의 앎이 부분적이며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고전을 읽는 독해력이 생긴다.

백건우가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불릴 수 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대상을 표현하기 전에 자신의 능력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한다. 겸손이 진지함을 낳고, 그 진지함이 깊이를 낳는 법이다. 우리 곁에 이런 노장이 있어 고전과의 끈을 이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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