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대 전환 따른 비정규직 해고·사측 사직서 강요 신규채용 꼼수
부평공장 조합원과 복직투쟁…46명 중 24명 현장으로 돌아가
노조 탈퇴 않고 끝내 버틴 성과 "후회없어…이룰 게 더 많다 생각"

2005년 이후 계속된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는 까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외치는 이들이 있어서입니다. 배성도(40)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지난해 해고된 배 지회장이 인천 부평공장과 전북 군산공장을 오가며 연대하는 모습도 담습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뭔지 같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라며 8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지난 이야기 : 2008년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으로 재입사한 성도. 2014년 12월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기는 걸 본 성도는 노동조합 문을 두드렸다. 대의원, 정책부장을 거쳐 2019년 말 지회장이 된 성도. 하지만 성도 앞에 닥친 현실은 '해고'였다. 창원공장과 군산공장이 닮아간다는 말을 떠올린 성도는 한국지엠이 철수한 도시, 군산으로 향해 김교명 전 군산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을 만났다.

◇믿음의 배신 = 교명은 2008년부터 한국지엠 군산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정규직과 같은 컨베이어에서 일을 했고 한국지엠 지시를 받았다.

잘나가던 군산공장 위기설은 2013년부터 나왔다. 글로벌GM 경영 전략에 따라 군산이 신차 생산에서 제외된 것이다. 위기설은 구조조정으로 바뀌었고, 구조조정 칼날은 비정규직 목을 겨누었다. 2014년 물량 감소를 이유로 하청업체와 도급 계약을 해지하면서 비정규직 350여 명이 공장을 떠났다. 교명에게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2015년 2월이었을 거예요.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이 일하던 곳으로 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한 달쯤 지나서 인소싱 절차가 거의 끝났어요. 비정규직은 출근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됐고요."

비정규직이 겪는 아픔은 이상하리만큼 같았다. 1년, 1년 계약을 연장하다가 한순간에 뚝 끊겨 버렸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성도는 입을 굳게 닫고 교명 이야기를 들었다.

교명은 뜻이 맞는 동료를 찾았다. '찍' 소리도 못하고 사라지긴 싫었다. 2015년 1월, 교명을 포함한 8명의 군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창원·부평공장 비정규직과 함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인천지방법원에 제기했다. 4월에는 군산공장 비정규직지회도 세웠다. 지회 설립 후 매일같이 선전전을 하며 사람을 모았지만 조합원은 12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회사가 하청업체 한 군데를 폐업시키는 등 노조를 만들었다가 크게 불이익을 당한 사례가 있어서다.

정규직 노조도 비정규직지회 설립을 크게 반기진 않았다. 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되고 힘이 커진다면 1교대제 전환이나 인소싱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진 믿음이 있었다. 싸우다 보면 바뀌리라 봤다. 하지만 2015년 6월 30일, 한국지엠은 비정규직 198명에게 해고예고 통보서를 보냈다. 2014년 5월 350여 명, 2015년 2월 1교대 전환에 따른 500여 명 해고에 이은 절망. 믿음만으로 살기에 세상은 너무 팍팍했다.

◇해고자의 삶 = 한국지엠은 해고 예고 후 약삭빠르게 대처했다. 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중 150여 명을 신규채용 형태로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단, 조건이 있었다. '사직서를 써야만 신규채용에 응할 수 있다'는 것. 신규채용에 응했다가 떨어지면, 위로금 1000만 원을 준다고도 했다.

지회는 사측 결정에 반발했다. '비정규직을 더 손쉽게 내쫓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 군산공장에 들어와 40대 들어서던 시점에 해고가 됐으니. 이대로는 못 나간다고 생각했어요. 한때 14명까지 갔었던 조합원은 해고 등을 거치며 9명으로 줄었고 그 9명이 6월 29일 천막농성에 들어갔죠."

교명의 표정이 잠시 찡그려졌다. 성도는 그 기분을 잘 알았다. 해고는 마치 전염병 같다. 한 사람의 일이지만 가족과 부모님,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전염병처럼 퍼져 삶을 옥죈다. 숙주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차라리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되풀이하게 된다.

▲ 2018년 4월 18일 인천시 부평구 한국지엠(GM) 부평공장 앞에서 열린 금속노조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철회 및 경영정상화 촉구 결의대회에서 노조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2018년 4월 18일 인천시 부평구 한국지엠(GM) 부평공장 앞에서 열린 금속노조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철회 및 경영정상화 촉구 결의대회에서 노조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비정규직 해고-신규채용은 마치 짜 맞춰진 각본처럼 돌아갔다. '우리는 쓰다가 버리는 쓰레기가 아니고 노예도 아니다', '살인과 마찬가지인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철회해야 한다'. 지회가 수차례 외쳤지만 사측은 외면했다.

투쟁은 길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2년 군산공장에서 일한 조합원들은 묵묵히 천막을 지켰다. 전북지역 사업장 등의 동지들을 찾아가 양말 판매 재정사업도 했다. 추운 겨울을 두 번이나 보냈다. 오전 8시 선전전을 마치고 나면 건설 현장으로 가 일거리를 찾았고, 저녁이면 농성장으로 돌아와 회의를 했다. 가정 불화, 조합원 탈퇴 등 아픔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동료가 시선을 피하며 공장 안으로 들어갈 때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버텼다. 같이 살고 싶었다.

◇선택 = "2018년 2월이었죠.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게. 그런데 결국 돌아온 건…."

성도 말이 맞았다. 2018년 2월 13일 군산공장 폐쇄 결정이 난 4시간 후에 인천지법은 군산·부평공장 비정규직 45명에 대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승소를 내렸다. 45명은 한국지엠 노동자가 맞다, 지엠은 고용 의무를 표시하라는 주문이었다. '3년 만에 살아서 돌아왔노라'며 외치고 싶었는데 교명 앞에 있는 건, 절망이었다.

"복직·공장 폐쇄 철회를 내걸고 다시 싸웠지만 그해 5월 한국지엠 군산공장은 결국 사라졌죠. 1년쯤 지나 동지들과 결단을 내렸죠. 텅 빈 군산에서 싸워봐야 소용이 없다. 부평으로 가자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는 군산에서 온 노동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뭉쳐 공동 투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부평으로 투쟁 터전을 옮길 때, 교명은 전북 전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왔다. 나고 자란 터전을 한순간에 등진다는 것, 가족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 역시 비정규직 삶의 단면이었다.

부평에서 교명은 복직 투쟁에 집중했다. 그 무렵 부평지회는 부평공장 정문 앞에서 26일간 집단 단식 투쟁을 벌였고, 정문 앞에 9m 높이 철탑을 설치해 61일간 고공농성을 했다. 민주노총과 함께 대규모 결의대회를 열었고 도로 위 오체투지 투쟁도 했다.

"그리고 올해 1월이네요. 군산·부평공장 해고자 46명 중 20명이 우선 복귀한 게. 군산에서 온 8명 중 5명도 현장으로 돌아갔고요."

성도 말에 교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명은 20명 안에 들어갔다. '5년 넘게 해고자로 살아온 동료가 있다, 해고 기간이 짧은 사람은 조금 더 버텨보자'는 동료 배려 덕분이었다. 6월 부평지회에서는 4명이 추가로 복직했다. 남은 건 22명. 교명이 노동조합 조끼를 벗지 않는 이유다.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성도가 물었다.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다른 일을 찾았더라면 더 잘됐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끝까지 싸운 덕분에 이렇게 한우물 파며 먹고살고 있네요. 앞으로 내 인생, 이 선택 위에서 이룰 게 더 많다고 생각되네요."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든든한 동료가 있다는 건 이렇게나 반가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배 지회장님, 부평 간다고요?"

"그래야죠. 부평에서 다시 봬요." 성도 눈빛이 선택을 말하던 교명만큼이나 빛났다. 그들 선택은 같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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