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둘러싼 뉴욕 전경 도입부
재즈 곡 '랩소디 인 블루'흘러
울부짖는 듯한 클라리넷 선율
마치 주인공 방황 예견하는 듯

굳이 흑백 필름이 아니었더라도 회색빛이 가득할 도시 뉴욕, 이상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며 고뇌하는 작가 아이삭은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17살의 고등학생인 트레이시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늘 어린 그녀에게 자신과의 만남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며 서로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자며 당부한다.

이는 앞으로 주어질 많은 기회를 포기하지 말라는 배려이기도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며 어쩌면 차가운 도시 속에 살다 더는 사랑이란 감정을 믿지 않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관에서 우연히 대면하게 된 매리, 그녀는 자신의 절친인 예일의 여자친구로 그날의 첫 만남은 불쾌했지만, 점차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며 가까워져 간다. 아이삭은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위해 직장을 뛰쳐나와 힘든 처지였으며 매리는 유부남인 예일과의 사랑으로 상처받고 외로웠던 것이다.

그렇게 가까워지다 결국 사랑하게 된, 아니 사랑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 둘. 하지만 이도 잠시, 매리는 아직도 예일을 사랑한다며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아이삭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트레이시는 이제 그가 주었던 조언대로 영국으로의 유학을 떠나려 한다. 이렇게 모두가 곁을 떠나 버린 상황에서 자신에게 소중했던 이들에 관하여 나직이 읊조리는 아이삭,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트레이시의 얼굴…." 이때 문득 깨달은 그는 이제 그녀의 집을 향해 달린다.

▲ 주인공 중 한 명인 17세 고등학생 트레이시. /캡처
▲ 주인공 중 한 명인 17세 고등학생 트레이시. /캡처

영화가 시작되면 뉴욕의 빌딩을 배경으로 귀에 익은 클라리넷 선율이 마치 새처럼 비상하다 지친 듯 내려앉는다. 이것은 마치 그 속에 살아보려 발버둥치다 이제는 영혼마저 시든 듯 고독한 것으로 이 곡은 바로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다.

'피아졸라'가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예술적 경지에 올려놓았듯 조지 거슈인은 미국의 재즈 음악에 동일한 업적을 남긴 음악가다. 어려서부터 정식 음악교육을 받는 대신 스스로 모든 것을 습득해 나가던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서 악보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틈틈이 작곡을 해 나간다.

그리고 1919년 발표한 '스와니'가 크게 히트하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뮤지컬과 영화음악에까지 창작의 영역을 넓혀나가던 그는 특히 재즈에 애정과 재능이 남달라 이를 미국인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예술적 정서로 여기며 순수음악의 영역까지 확대해 나가는데 그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성공적인 결과물이 바로 '랩소디 인 블루'인 것이다.

곡은 당시 재즈왕이라 불리던 '폴 화이트먼'의 권유로 자신의 작품 오페레타 '블루 먼데이'를 자유로운 형식을 지닌 재즈 협주곡으로 변형,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폴 화이트먼이 이끄는 재즈 밴드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협연으로 1924년 2월 뉴욕 에올리언홀에서 열린 '현대음악의 실험'이란 콘서트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랩소디 인 블루'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도입부 '글리산도(높이가 다른 두 음의 사이를 급속히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방법)'가 초연의 연습 중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로스 고먼'이 장난삼아 연주한 것에 영감을 얻은 거슈인이 좀 더 처절하게 연주할 것을 주문, 곡에 적용하였다고 하니 그 탄생마저 재즈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렇게 등장한 곡은 그 초연부터 관객의 사로잡아 당시의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역사적인 자리에는 러시아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곡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켜 연주회는 이어졌으며 레코드는 100만 장이 넘게 팔려나간다.

그렇게 '랩소디 인 블루'는 거슈인을 단숨에 세계적인 작곡가, 그리고 미국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후 작품은 작곡가 '그로페'에 의해 두 번의 편곡을 더 거치며 그 기능성을 더욱 확대하는데 오늘날 연주되는 것은 주로 1942년의 마지막 오케스트라용 편곡 버전으로 아직도 미국을 대표하는, 그리고 대도시의 공허함을 떠올릴 때면 항상 오버랩되는 명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하니 영화 <맨하탄>의 오프닝, 회색빛 빌딩으로 둘러싸인 뉴욕을 배경으로 울부짖듯 상승하는 클라리넷 선율은 그 어울림이 절묘하여 '랩소디 인 블루'가 왜 뉴욕의 음악인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 〈맨하탄〉 속 회색빛 도시 전경./캡처
▲ 〈맨하탄〉 속 회색빛 도시 전경./캡처

트레이시의 집 앞을 뛰어 도착한 아이삭,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치고 막 공항으로 향하려던 참이다. 이때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아이삭, 가라며 떠밀 때는 언제고 이제는 어이없게도 가지 말라며 애원한다. 외로운 도시에서 허망한 사랑만을 해 오던 아이삭에게 진실된 사랑을 알려 준 그녀를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6개월', 그런 그에게 트레이시는 6개월 후면 돌아오니 기다려 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삭은 너무 긴 시간이라며,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며 그냥 가지 말라고 한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섞여 살았으니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믿고 그 숭고함과 영원함을 주장하는 트레이시에게 있어 6개월은 아무것도 아니며 결코 자신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일 뿐이다. 하여 그녀는 자신보다 20년을 넘게 더 살았지만 배운 것이라곤 도시의 허무함과 덧없음뿐인 그에게 오히려 충고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조금은 믿음을 가져야 해요.(You have to have a little faith in people.)"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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