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경찰 이정출 거사 장면
유유히 흐르는 곡 '볼레로'
최고조서 카타르시스 선사

삶을 이어감에 있어 매 순간이 선택이다. 어떠한 것을 선택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사소한 것들이 있는 반면 한 개인의 인생을 넘어 역사에 두고 죄인과 영웅을 가를 수 있는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이러한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 것인가가 명확하여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선택처럼 다짐한대도 막상 눈앞에 그 순간이 놓인다면 말이다.

일제 강점시절,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경찰 이정출(송강호)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배후에 접근하여 일망타진하라는 특명을 받아 이에 핵심이라 파악되는 김우진(공유)과 접촉하게 된다.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려는 작전을 파고들어 의열단의 단장인 정채산까지 모두 잡아들이려는 음모인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렇게 다른 목적을 가진 채 가까워지는 둘. 한편 의열단 우진은 경찰이라는 정출의 신분을 이용해 폭탄을 무사히 들여올 심산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단장 정채산과 조우하게 된 정출은 결국 권고에 넘어가 폭탄 반입을 돕기로 하지만 확실한 선을 긋고 싶다. 돕기는 하되 자신이 지닌 안정적인 지위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리어 그들을 돕게 된 정출은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을까?

작전에 투입되었던 단원들은 또 다른 밀정의 비열한 배신에 모두 체포되어 고문의 상처를 안은 채 법정에 서고 이들과 함께 정출도 피고의 입장이 되어 진술한다. '그저 일본의 경찰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때 진술을 마친 그가 법정을 빠져나오는 것을 안타까운 듯, 절박한 듯 바라보는 우진. 이렇듯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상황에서 경찰 간부들과 매국 인사들의 모임이 개최되고 이곳에서 단원들을 밀고해 감옥으로 몰고 간 밀정의 단죄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폭탄 테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때 인사를 건네며 유유히 계단을 내려오던 경찰 수장의 눈에 들어온 정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서 우진은 정출에게 이 모든 작전을 부탁한 것이며, 그렇기에 우진의 눈빛이 간절했던 것이다.

마침내 정출은 자신의 집에 숨겨 놓았던 폭탄으로 거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장면을 따라 홀린 듯 유유히 흐르던 선율이 있으니 바로 프랑스의 천재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Bolero)'다.

▲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은 의열단 김우진에게 접근해 단장 정채산까지 모두 잡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채 가까워지는 둘. 이정출은 결국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스틸컷
▲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은 의열단 김우진에게 접근해 단장 정채산까지 모두 잡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채 가까워지는 둘. 이정출은 결국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스틸컷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라벨'은 내어주는 음색에 있어 드뷔시와 닮아 있는 듯하지만 이를 넘어 좀 더 고전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구성적 작품들을 만들어 낸 작곡가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로부터 '스위스의 시계공'으로 비유되기도 한 그는 관현악법의 대가로 '무소륵스키'의 피아노 작품인 '전람회의 그림'을 관현악으로 멋지게 편곡한 데서 그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음악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음악과 가깝게 지내던 그는 14세 이후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1899년 발표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정작 당시 일류 음악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로마상 콩쿠르에 번번이 낙선한다.

하지만 이미 음악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는 보수적인 음악계를 향한 평단의 비판으로 연결, 결국 음악원 원장의 경질로까지 번지게 되어 오히려 그의 명성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런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스페인 취향의 명곡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스페인 계열이었던 어머니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으로 대표적인 작품으로 '스페인 랩소디', '하바네라' 등이 있다. 영화에 사용된 '볼레로' 역시 이러한 취향이 반영된 역작인 것이다. 볼레로란 18세기경 스페인 민속 무용의 한 형식인 캐스터네츠로 연주되는 리듬 반주에 따른 춤곡으로 당시 유명했던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Ida Rubinstein)의 의뢰를 받아 1928년 완성한 곡이다.

작품은 '스페인의 어느 한 허름한 술집, 희뿌연 가게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고 그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서 어느 한 댄서가 춤을 추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춤은 같은 리듬이 반복되며 고조되어 가고 점차 손님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마침내 모두 일어나 무용수와 함께 격렬하게 춤을 춘다'는 내용의 무곡으로 라벨의 독창성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어 이제는 연주회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다.

그 중동적인 멜로디로 인해 한번 듣고 나면 끊임없이 귓속을 맴도는 마력을 지닌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6분이란 시간 동안 동일한 리듬 속에서 단 두 가지의 선율이 악기만 바뀔 뿐 지속적으로 반복되니 선율적인 각인이 최면처럼 이루어지며 막상 그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기어코 감각적 카타르시스마저 선사하니 어찌 쉬이 잊을 수 있겠는가?

곡은 단순한 재료로 최고의 효과를 구현한 작품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는데 사실 그 단순함 속에서 악마 같은 난곡으로 악명 높다. 이는 주제를 교대로 연주해야 하기에 연주자의 기량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곡의 구조로 인한 것이다. 또한 스네어드럼은 처음부터 연주가 끝나기까지 계속하여 같은 리듬을 연주해야 하기에 긴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는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하니 이러한 곡의 형식적 특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음악'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터져 나오는 희열은 상당한 것으로 이에 영화 <텐(10)>에서의 섹스에 가장 훌륭한 배경음악이라는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또한 이러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곡이다 보니 다양한 분야에서 그 선율을 빌려 사용하는데 먼저 떠오르는 것이라면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 조가 이 곡을 배경으로 멋진 공연을 연출하여 심판 전원 예술점수 만점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후 '볼레로'는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서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그리고 영화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곡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옥고를 치르고 있는 우진과 그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가가 된 정출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흐느끼는 곡이 있으니 바로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중 '제10번(Slavonic Dances, Op.72 No.2)'이다.

슬라브 무곡은 무명이었던 드보르자크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그의 역작으로 1878년(Op.42)과 1886년(Op.72) 각각 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처음은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이었으나 이후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되는데 이는 슬라브적 정서를 절대음악으로 세련되게 풀어낸 결과물로 향토적 색채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중 2번째 출판본의 2번(10번)이 16곡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며 그 선율이 아련하여 마치 황량한 벌판을 외로이 홀로 걷는 듯 쓸쓸한 서정을 전하는데 이렇듯 우수에 찬 선율이 영화의 마지막 을씨년스러운 장면에 녹아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이다.

범인과 영웅의 차이는 정의로운 것에 대한 신념과 그 믿는 길을 걷는 용기다.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시절, 그 끝이 보이지 않음에 주저앉고 싶은 범인들을 이끌고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범인들이 품었을 이 의문은 터널의 끝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라면 푸념이자 비아냥이었겠지만 밀고자에게 정출이 건넨 물음은 의심이 아닌 단호한 신념이다. 범인이 영웅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독립이 될 것 같소, 영감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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