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한 필력으로 절개 등 표현
청나라 오창석·포화 영향 받아

운미 민영익은 명성황후 친족으로 정계 요직을 맡다가 러일전쟁 후 친일파가 득세하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여기서 민영익은 청나라 서화계 거장 오창석, 포화 등과 교류하며 '난을 물 흐르듯 쳐내고, 붓 다루기를 칼로 쑥을 베듯' 하며 망명객(亡命客) 심회(心懷)를 난향으로 내뿜었다.

당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 그림이 세상에 풍미했다. 그렇게 석파난이라고 불리는 대원군의 난초 그리기와 대비되는 난초 그림이 민영익의 운미난이다. 두 사람의 그림 분위기를 보면 매우 강건하면서도 날카롭고 또한 가냘프면서 유려한 곡선미가 다른 듯 같다.

그러나 운미난은 붓 중심에서 발출되는 힘이 강건한 필력의 형세를 유지해 앙앙불락하는 지사적 분위기가 뛰어나다. 이런 미감은 석파난과 운미난이 추사 영향은 같이 받았으되 운미난은 민영익이 오창석, 포화 등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새로운 미의식이 생성돼 독자적으로 모던한 경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 민영익 '묵란도'. /경남도립미술관
▲ 민영익 '묵란도'. /경남도립미술관

상해 망명 시절 오창석은 민영익을 위해 도장 300여 개를 새겨서 그림에 찍을 수 있도록 하는 우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 난초 그림에 화제로 된 글씨는 중국 화가 포화가 쓴 내용과 민영익이 직접 쓴 내용이 있다.

포화가 쓴 화제는 '향원각익청(香遠覺益淸)', 향기가 멀리 더욱 맑음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군자의 맑은 정신세계가 이루는 경계를 말하고 있다. 즉 군자의 지조 절개 자세가 난초의 자태와 향기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영익이 쓴 화제는 '추란고운(秋蘭高韻)'으로 가을 난초의 높은 운치라는 내용으로 역시 군자의 품격을 가탁하고 있다.

난초를 두고 옛글에 '군자가패(君子可佩)', 군자가 패용할만하다고 했다. 식물을 의인화해 인격을 부여한 것이 곧 사군자, 육군자, 팔군자, 십군자 등등 개념이다. 고상한 인격을 비유하는 데 식물의 생태적 상황을 적절히 대비시켜 수양과 수련의 목적으로 차용하는 지혜를 선인들은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식물에서 인격을 연상하는 감성의 아름다움은 본받고 이어가야 할 문화적 자산이다.

이제 붓을 들어 난초를 쳐보자. 난초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친다고 한다. 역시 사군자를 그린다가 아니고 사군자를 친다는 연유를 붓을 들어 확인해 봄도 사뭇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붓과 종이의 마찰이 일으키는 리듬을 손으로 감지하면서 마음속으로 빼어난 난초의 자태와 꽃향기를 상상하고 음미하여 나의 순수한 세계관을 형상화해보는 시간은 분명히 초월적 경계를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이리라.

동시에 붓을 통하여 종이로 배어드는 먹물 빛깔은 나의 마음을 침잠에 들게 할 것이다. 그곳에서 현실의 가식이 아닌 본연의 나를 발견하는 지점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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