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가 여왕 '앤' 배신 목격 장면에 흐르는 슈만 '피아노 5중주 제2 악장'
절뚝거리듯 불안한 리듬의 장송행진곡…억장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 대변

'더 페이버릿(The Favorite)', 가장 총애하는 자라는 뜻으로 자신의 고민을 가감 없이 털어놓을 수 있으며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이자 친구를 말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위치에 앉은 이라면 어떠한 자를 옆에 두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야 할 것으로, 이는 자신의 처지는 물론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라는 것이 그렇지 못하여 충언이 귀에 거슬려 멀리하고 간사한 혀에 눈이 멀고 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릇된 이를 곁에 두어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 내린 사연들을 어렵지 않게 나열할 수 있지 않은가.

◇여왕 앤과 사라, 애비게일

16세기 영국의 절대권력이라 할 '앤' 여왕, 그녀의 곁엔 항상 어릴 적부터 친구이면서 몸이 불편한 자신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아 주는 조력자이자 은밀한 사랑 '사라'가 있다. 언제나 돌직구를 날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그녀이지만 여왕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왕궁의 시녀로 들어온 몰락한 귀족 출신의 '애비게일'이 둘 사이에 끼어 들면서 그동안의 모든 흐름이 급변한다. 애비게일은 사라와 달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로 점점 여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바꿔 신분 상승을 노리는 행동일 뿐이다. 이제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한 사라와 야망의 애비게일은 여왕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을 이어가지만 여왕의 마음은 점차 애비게일에게로 기울어 간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사라. 하지만 그녀 역시 당찬 심성의 소유자이기에 상황을 반전시키려 노력하고 에비게일은 독버섯을 이용하면서까지 사라를 여왕으로부터 떼어 놓으려 하는데….

비밀 통로를 지나 여왕의 처소에 도착한 사라.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애비게일과 침소에 누운 여왕을 본 그녀의 표정은 내려앉았고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 나온다. 그리고 이때, 장면의 어둠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던 선율이 있으니 바로 독일의 작곡가 슈만 (Robert Schumann)의 피아노 5중주(Piano Quintet in E flat Major, Op.44)의 제2악장 '행진곡 풍으로: 다소 느리게(In modo d'una marcia: Un poco largamente)'이다. 곡은 4부의 마지막, 여왕이 사라를 두고 애비게일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장면과 8부에서 사라가 여왕에게 '당신의 눈을 찌르고 싶다'는 무엄한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으니 사라의 질투 테마인 것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무너지는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니 장면과 곡의 악상이 어울려 절묘하다.

▲ 왕궁의 시녀로 들어온 몰락한 귀족 출신의 '애비게일'. /스틸컷
▲ 왕궁의 시녀로 들어온 몰락한 귀족 출신의 '애비게일'. /스틸컷

◇슈만의 음악적 동반자 클라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 1810년 독일의 츠비카우에서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문학과 철학적 교양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거쳐 음악적 재능 또한 드러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가난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원치 않던 어머니는 그를 강권하여 법대에 진학하도록 하지만 피 속에 흐르는 음악적 기질을 감출 수는 없는 법. 슈만은 학업과 피아노 공부를 병행하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어머니에게 보내는 '돈 없는 음악가로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길에 들어서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늦은 시작이기에 혹독했던 피아노 수련으로 인해 결국 손가락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 온다.

연주자의 길을 위해 대학마저도 포기한 슈만에게 찾아온 위기. 하지만 그가 지닌 재능은 연주에만 있지 않아 작곡가로서의 길로 접어드는데 이에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후대의 음악평론가들은 오히려 이러한 불행이 '신께서 음악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시기 글쓰기에도 소질이 있던 그는 여러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라는 잡지를 출간, 음악 평론가로서의 재능 또한 펼쳐 보인다. 이를 통해 젊은 음악가들을 세상에 소개하여 빛을 보게 한 것 역시 음악사에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그 대표적인 작곡가가 바로 '쇼팽(Chopin)'과 '브람스(Brahms)'인 것이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찾아온 첫사랑에 실패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상심한 그에게 찾아온 운명 같은 사랑이 있었으니 바로 '클라라 비크(Clara Wieck)'와의 만남이다. 슈만의 피아노 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k)'의 딸이자 뛰어난 미모를 겸비한,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클라라. 평생 동안 슈만에게 음악적 동반자로서 영감의 원천이었던 그녀와의 러브스토리는 과연 낭만주의의 대표 음악가다운 것이다. 앞길이 불투명한 작곡가와 인기 피아니스트의 만남은 당연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소송까지 가고서야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16세기 영국의 절대권력 '앤' 여왕. /스틸컷
▲ 16세기 영국의 절대권력 '앤' 여왕. /스틸컷

이후 둘은 함께 연주 여행을 다지며 음악적 동지로서 활동을 해 나간다. 그러던 중 슈만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며 1842년에 이르러 3개의 현악 4중주를 비롯한 많은 실내악의 걸작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특히 이 시기 작곡된 피아노 5중주는 형식과 내용이 완벽히 조화를 이룬 명곡이다. 아름다운 선율로 인하여 슈만의 실내악곡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현악 4중주에 피아노를 추가한 편성으로 자신의 사랑 클라라를 염두에 둔 작업으로 이는 그녀에게 이 곡을 헌정한 것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또한 이러한 편성은 당시 새로운 시도였기에 이후 브람스, 드보르자크(Dvorak) 등 후배 작곡가에게도 폭 넓은 영감을 제공하는데, 동 편성의 명곡들이 탄생할 그 시작으로서의 음악사적 가치 또한 높다. 영화에 사용된 곡의 2악장은 그 절뚝거리듯 불안한 리듬이 인상적인데, 사랑하는 이(여왕)의 배신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라의 세상이 꺼질 듯한 심정을 관객의 귀를 통해 전하는 것이다. 이는 청각적 전달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뛰어넘는 음악적 장면인 것이다. 그렇게 곡은 슈만이 창조한 실내악적 장송행진곡이자 육신이 아닌 정서의 스러짐과 낭만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서정인 우울함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예술적 성과인 것이다.

▲ 16세기 영국의 절대권력 '앤' 여왕의 은밀한 사랑이자 조력자인 '사라'. /스틸컷
▲ 16세기 영국의 절대권력 '앤' 여왕의 은밀한 사랑이자 조력자인 '사라'. /스틸컷

◇불안과 집착

작곡가 슈만과 여왕 앤, 다른 시대를 살고 간 둘이지만 그들은 정서적인 불안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차이라면 슈만이 선천적이라면 여왕 앤은 지내왔던 환경에 의해 생성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이러한 그들의 심적인 불안감은 상대방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된다. 사랑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라의 말에 한계가 없어야지 하며 어리광을 피우던 여왕의 투정은 그렇기에 안타까우며 위로의 대상인 것이다.

여왕이기 이전에 17명의 아이를 잃은 여인. 외로움과 상실의 정서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그녀에게 사라는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자 사랑이었음에도 어쩐 일인지 여왕은 그녀를 버린다. 순간적인 감정이었으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벌인 어린아이 같은 투정. 하지만 일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으며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아마도 마음속에 상처를 품어 피고름을 안은 이들의 표현법인가 보다. 하여 사라는 물어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충분히 상황을 바꿀 수 있음에도 웬 고집이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여왕 앤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마음속의 딱지가 아직도 아파 자신도 어쩔 수가 없다며, 의식이 없던 슈만이 클라라에게 남긴 마지막 말처럼 한숨같은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나도 알아…….'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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