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치여 들어온 작은 민박
소박한 생활 통해 '쉼'보여줘
대사 빈자리 자연의 소리 가득
정갈한 음식·바다 풍경 볼거리

"아무리 성실히 산다고 해도 휴식은 필요해요."

섬마을 작은 민박집 '하마다'에 3년 만에 봄 손님이 찾아온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을 찾아왔다는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는 몸체만 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모래사장을 지난다. 깐깐해 보이는 타에코는 인심 좋은 민박집 사장의 친절이 부담스럽다.

같은 날 섬마을에 도착한 다른 이가 있다. 수수께끼 빙수 아주머니 사쿠라(모타이 마사코). 그녀는 매년 봄이면 이곳을 찾아와 얼음이나 식재료, 연주를 받고 빙수를 판다. 그러니까 무료로 빙수를 나눈다.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타에코는 아침마다 자신을 깨우러 오는 것, 함께 밥을 먹는 것, 사쿠라의 '메르시 체조', 사쿠라가 권하는 빙수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려는 타에코에게는 모든 게 귀찮기만 하다.

결국 타에코는 민박집을 떠나 다른 호텔로 간다. 하지만 '오전에는 밭일, 오후에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곳의 방침을 듣고는 먼 길을 걸어 하마다로 돌아온다.

'손님이 많이 올까 봐' 손바닥만 한 간판을 걸어둔 하마다 사장 유지(미쓰이시 겐)와 한없이 자상한 사쿠라, 생물 선생님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와 재회한 타에코는 별나게만 보였던 그들의 삶에 차츰 젖어간다.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 사연은 똑부러지게 드러나는 게 없다. 유지와 사쿠라가 무슨 관계인지, 사쿠라가 봄에 이곳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 건지, 손님도 아닌 하루나가 왜 이 민박집에 머무는 것인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함께 먹고 이야기 나누는 그것에만 집중한다.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2007년 작품이지만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쉼'이라는 가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꽤 와 닿는 영화다. 타에코가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이유도 짐작이 간다. 쏟아지는 일에 치이고 치이다 숨어버리고 싶었을 터.

'쉼'을 다뤘다는 데서 눈치 챘겠지만 대사가 많진 않다. 표정과 최소한의 대사로 휴식과 자유, 사색에 대해 말한다. 그렇지만 지루할 틈은 없다. 대사가 빈자리는 잔잔한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 묵직한 첼로, 멋스러운 만돌린 연주 소리가 채운다.

유화처럼 매력적인 빛깔의 바닷가 풍경, 정감있는 민박집, 정갈한 식탁과 음식 등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것만으로도 관람객에게는 휴식이 될 테다.

일본 영화를 자주 본 이들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겠다.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 전작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카모메 식당(2006)>이다. 주인공 고바야시 사토미와 모타이 마사코 역시 <카모메 식당> 주역이다. 감독은 자신만의 감성으로 영화를 더욱 따사롭게 완성했다.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영화 제목처럼 민박집 하마다에 머무는 이들은 모두 자기 캐릭터에 어울리는 안경을 쓰고 있다.

타에코는 엄격해 보이는 납작한 검정 뿔테 안경, 유지는 놀랍게도 요즘 유행하는 투명 뿔테 안경, 하루나는 선생님들이 쓸법한 반테 안경, 사쿠라는 독특한 모양의 동그란 안경을 꼈다.

제목이 '안경'인 이유는 영화 막바지에 이르면 유추할 수 있다. 타에코가 검정 뿔테 안경을 잃어버린다. 영화 초반이었다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당장 차를 세우고 안경을 찾으려 했겠다. 하지만 타에코는 안경이 날아가 버리자 '뭐 어때'라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어 보인다.

안경이라는 게 사물을 자세히 보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기능을 빼고 보면 참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제목 '안경'은 눈에 불을 켜고 무언가를 찾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을 즐기기 바란다는 감독의 메시지는 아닐까.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 오기가마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 속 한 장면. /스틸컷

영화를 보고 있자니 조용히 앉아 사색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사색하는 데 요령이 필요한 이들에게 유지는 이렇게 조언한다. "예를 들면 옛 추억을 그리워한다든지, 누군가를 곰곰이 떠올려 본다든지." 매일 확진자 숫자를 확인하고, 휴대전화 알림에 귀 기울여야 하는 요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사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흘러가는 대사들 속 귀에 꽂히는 대사들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조급해하지 않으면 반드시 언젠가." "여행은 문득 시작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죠?" "우연히도 인간이라 불리며 이곳에 있는 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무엇과 싸워왔는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짐을 내려놓을 즈음/ 좀 더 힘을/ 부드러워질 수 있는 힘을/ 무엇이 자유인지 알고 있다/ 무엇이 자유인지 알고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