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 마산상고 때 씨름 입문해 1974년 전국대회서 15전 전승…경남대 교수로 선수 양성 힘써
이승삼 마산중서 모래판 첫발 후 1980년대 세 차례 한라장사…기획력으로 '씨름 예능'이끌어

1960년대 초·중반 '전국 최강' 입지를 다져가던 마산 씨름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시대 씨름을 연마하기 위한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씨름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 생계도 보장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1960년대 후반 극에 달했다. 오랫동안 마산 씨름을 대표하던 모희규 등이 직장 문제로 속속 타 시·도로 이동한 까닭이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가 있다. 마산 씨름이 맞닥뜨린 고민을 해결함은 물론, 씨름 성지 입지를 완전히 다진 장사. 바로 학산 김성률(1948~2004)이다.

◇모래판의 전설 = 1948년 3월 마산 창동에서 태어난 김성률이 정식으로 씨름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고교(마산상고·마산용마고) 2학년 때다. 물론 그전에도 김성률은 갖가지 운동에서 재능을 뽐냈다. 초등학교 때는 원반·포환 던지기 등의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성호초등학교를 거쳐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김성률은 축구부에서 주로 활동했다. 1962년 10월 마산에서 열린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중등부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씨름에 두각을 나타낸 김성률이었지만, 여전히 김성률과 씨름 간극은 컸다.

고교에 진학해서도 김성률은 씨름보단 축구부 활동에 더 힘을 쏟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못 먹고 어려운 그 시절, 90㎏에 달했던 김성률은 씨름부 영입 타깃이 됐다. 마산 대표 선수이자, 이후 일양민속씨름단 감독이 된 권영식, 마산상고 선배 김성수가 스카우트 선두에 섰고, 김성률은 얼마 가지 않아 '진짜 씨름인'이 됐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씨름 실력을 키워갔다. 성과도 바로 나왔다. 1965년 8월 김천에서 열린 제2회 전국장사씨름대회 개인전에서 김성률은 성인 역사를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제2회 천하장사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는 고등부 1위, 성인부 4위에 올랐다.

▲ 1973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성률 장사와 마산 선수들 환영식. /경남대
▲ 1973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성률 장사와 마산 선수들 환영식. /경남대

고교 졸업 후 그가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나라 씨름계는 본격적으로 '김성률 시대'를 맞았다. 1967년 민주공화당의장배 전국장사씨름대회, 1969년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 장사부, 1970년 제7회 대통령기 쟁탈 전국씨름대회 등 숱한 대회에서 김성률은 주인공이 됐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성률이 국민에게 확실히 각인된 건 1972년 9월 열린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다.

이 대회는 TV 생중계로, 그것도 야외 모래판이 아닌 실내(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려 관심을 끌었다. 예선을 거친 8명의 장사가 풀 리그전 끝에 맞은 대회 결승에서 김성률은 거구의 박범조(경북)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안방까지 파고든 씨름 열기 중심에 김성률이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김성률은 이후 10여 년의 세월 동안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1974년 제3회 전국장사씨름대회 15전 전승, 대통령기 대회 8연패, 회장기 대회 4회, KBS배 대회 4연패 등의 대기록이 김성률 입지를 보여준다.

최강자 김성률은 1970년대 후반 현역에서 은퇴했다. 김성률은 특히 1975년 제27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서 고등학교 2학년이던 홍현욱에게 패하기도 했는데, 씨름인들은 그 결과로 은퇴가 앞당겨졌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단, 은퇴 후에도 김성률은 체육을 향한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40세를 눈앞에 둔 1986년 김성률은 아시안게임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슈퍼헤비급 한국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다. 선발전에서 비록 3위에 그쳐 아시안게임에 참가하진 못했지만 식지 않은 운동 능력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김성률의 씨름 업적을 기리고자 씨름 후배들은 2004년 6월 제1회 학산 김성률배 전국장사씨름대회를 마산체육관에서 열었다. 하지만 김성률은 대회 개막을 보름 정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마산상고 시절 김성률 선수. /창원씨름협회
▲ 마산상고 시절 김성률 선수. /창원씨름협회

그 시절 김성률을 봤던 혹은 그에게서 씨름을 배웠던 씨름인들은 오늘날 저마다 방법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고교 시절, 당시 경남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성률 선배가 마산상고를 방문해 씨름 기술을 전수해주곤 하셨어요. 10~20초 만에 고교 선수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데도 20분 이상 묵묵히 버텨주며 기술을 받아주셨죠.(정진환 마산용마고 씨름부 감독)"

"김성률이 중요한 이유는 탁월한 성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대 심리를 이용하여 사용되는 기술을 창안한 기술씨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덧걸이는 김성률이 고안한 것이다. (마산시체육사)"

◇뒤집기의 달인 = 김성률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씨름 행정, 연구·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김성률은 특히 경남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쟁쟁한 선수를 길러냈는데, 그중 한 명이 이승삼(60)이다.

초등학교 시절 이승삼 꿈은 프로 레슬러였다. 아침에 등교하면 분필로 칠판 한편에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이승삼'이라고 적고 일과를 시작할 정도였다. 미래 레슬러를 바라보던 이승삼이 씨름의 길로 들어선 건 중학교(마산중) 3학년 때다. 당시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이승삼은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친구에게 매일 씨름만 하면 지는 게 싫어 무턱대고 씨름부를 찾아갔다. 씨름부에 입단한 지 일주일 만에 친구를 이긴 이승삼은 그 작은 승리에 도취해 씨름의 길로 들어섰다.

마산상고 졸업반 때는 이승삼을 붙잡고자 많은 대학이 '러브콜'을 보냈으나 이승삼은 경남대 진학을 택했다. 1982년 제19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 대학부에서 이봉걸(충남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등 씨름계에서 저변을 넓혀가던 이승삼은 1983년 잊지 못할 사건을 맞는다.

▲ 털보 선수로 유명했던 이승삼 선수. /창원씨름협회
▲ 털보 선수로 유명했던 이승삼 선수. /창원씨름협회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대회. 경남대 4학년이던,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이승삼을 두고 '우승 후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주인공은 바뀌었다. 이승삼은 대회 체급장사 16강전에서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정작 천하장사 경기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같은 학교 이만기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이준희, 최욱진 등을 누르며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만기가 마산 시내를 카퍼레이드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이승삼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환영행사에서 축 처져 있던 이승삼을 격려한 건 당시 경남대 이순복 총장이었다. '빨리 끓는 냄비는 빨리 식는다'며 그를 다독거린 이 총장 덕에 이승삼은 마음을 다잡고 씨름에 집중하게 됐다.

1991년 3월 17일 모래판을 떠나기까지, 이승삼은 한라장사 타이틀을 세 차례(1985·1986·1988년) 안았다. 물론 꿈에 그리던 천하장사 타이틀은 얻지 못했다. 1988년 제14회 천하장사 결승전에서는 이만기에게 패해 1품에 그쳤고, 이듬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천하장사 대회에서는 이봉걸을 넘지 못했다. 1990년 대회에서는 4품을 땄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이승삼은 경남대와 마산·창원시청 씨름 감독 등을 역임했다. 이 중 창원시청 감독 시절이던 2004년에는 제자 정경진을 천하장사에 올리며 '한'을 풀기도 했다.

감독직에서 내려오고 나서, 문화체육인 후원자, 대한씨름협회 심판위원장으로 산 이승삼은 2019년 협회 사무처장에 선임되며 다시 씨름계 최전선에 섰다.

씨름계에서 이승삼은 '아이디어 뱅크'로 통한다. 2005년 마산 세계민속씨름축제 개최에 앞장서고 최근 씨름 예능을 이끌며 씨름 부활을 이끈 게 한 예다. 당연히 다음 계획도 있다.

"남북 씨름 대회 공동 개최뿐 아니라 세계씨름협회 창립 등을 준비해야 할 듯해요. 서울, 창원 등에 씨름전용 경기장을 건립하는 일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야죠."

▲ 지난 2005년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추억의 경기에서 이승삼이 왕년의 뒤집기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 지난 2005년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추억의 경기에서 이승삼이 왕년의 뒤집기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