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다른 경기방식 '왼씨름' 통일 후 승승장구
무학산서 연마…연령 구분 없는 훈련으로 기술 전수

지난 18일 창원시가 '씨름의 성지 창원' 조성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씨름전용경기장 건립, 서원곡 씨름장 주변 특화거리 조성 등을 추진과제로 삼은 조성계획에 씨름인, 지역민 관심이 큽니다. 이에 맞춰 <경남도민일보>는 창원이 씨름 성지가 된 이유와 그 중심에 섰던 인물, 오늘날 창원 씨름 명맥을 잇는 감독 등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씨름 성지 창원(마산). 익숙한 말이나 문득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어떻게 창원은 씨름의 성지가 됐을까' 하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씨름 성지 창원'은 환경과 사람이 낳은 산물이라고.

◇왼씨름의 고장 = 마산과 씨름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2017년 발간된 <한국 속 경남>(남석형·이서후·권범철 저, 피플파워)은 임영주 마산문화원장 입을 빌려 마산에서 씨름이 성행한 환경적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04년 큰 해일 피해를 보고 난 이후 마산에서 성신대제가 매해 열렸다. 제를 지내고 나서 씨름대회를 연 기록이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마산은 그 이전부터 씨름을 유난히 많이 했다. 마산은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창이었다. 곡식을 배에 실어나르려면 힘쓸 장정이 필요했을 거다. 그래서 씨름을 장려해 힘센 사람을 발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생활 속에 씨름이 자연스레 스민 것에 덧붙여 씨름 성지 창원 탄생을 앞당긴 결정적인 요인도 있다. 일찌감치 왼씨름(왼손으로 다리 샅바를 잡고 하는 씨름)이 자리 잡은 것이다.

과거 씨름은 왼씨름, 오른씨름, 띠씨름, 바씨름 등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경기를 치렀다. 1927년 만들어진 조선씨름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 경상도를 비롯해 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는 왼씨름을, 전라도·경기도는 오른씨름을 했다. 이에 협회는 그해 왼씨름을 원칙으로 통일하기로 하고 각 대회를 열었는데, 남북이 갈라지기 전까지 대회를 휩쓴 건 왼씨름을 하던 이북 선수들이었다.

한 예로 1927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에서는 함흥 출신의 이도남이 우승을 차지했고, 다음해에 열린 2회 대회에서는 함주 출신 김윤근이 패권을 잡았다. 1936년 열린 제1회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역시 우승은 함흥 출신의 현명호에게 돌아갔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남한 씨름 패권은 곧 마산이 차지했다. 광복 직후 결성된 마산씨름협회를 중심으로 많은 씨름 대회를 개최하는 등 서서히 영향력을 끌어올리던 마산 씨름은 1956년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1958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씨름부까지 창단하며 위세를 떨쳤다.

그 무렵, 장대한 기골과 왼씨름을 앞세운 마산 장사도 많이 나왔다. 1945년부터 약 10년간 마산 씨름계는 전팔룡·박명규·배용찬이 이끌었다. 1950년대 들어서는 모희규와 김형식이 배턴을 이어받았는데, 두 선수는 1959년 8월 28일∼9월 8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씨름대회에 참가하며 2위(모희규)·3위(김형식)에 올랐다. 특히 김형식은 당시 전국 최강이던 김학동을 이겨 마산 씨름 명성을 재차 과시했다.

1960년대에는 마산 씨름 전성기가 열렸다. 대표적으로 1961년 11월 전주중앙구장에서 열린 전국장사장군씨름대회에서 마산 씨름인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 대회는 칭호를 주는 대회이기도 했는데, 마산의 박영식은 1위를 차지하며 일약 장사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 2위에 오른 모희규는 장군 칭호를, 5위의 박두진은 선사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 7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6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서는 마산이 대구·김천 등을 누르고 도시대항전 우승을 차지, 마산 씨름의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이후에도 마산 씨름단은 각종 전국 대회에서 대활약했다. 1964년 8월에 김천체육회가 주최한 전국남녀장사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마산은 1965년 8월 열린 제2회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도 도시대항전과 개인전 1∼3위를 모두 휩쓸었다. 1965년 11월에는 마산씨름협회 주최로 제2회 천하장사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가 마산 3·15회관 앞 광장에서 열렸는데, 이 대회 역시 마산이 1∼4위를 독차지했다. 1966년 11월 열린 제20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씨름선수권대회 역시 마산은 도시대항전에서 우승했다. 남한 대표 왼씨름의 고장이, 전국을 대표하는 씨름 성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 2017년 열린 제98회 전국체육대회 씨름 대학부 경장급 결승전에서 경남대 황찬섭이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2017년 열린 제98회 전국체육대회 씨름 대학부 경장급 결승전에서 경남대 황찬섭이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무학산 정기 받아 = '씨름 성지 창원'이 있기까지는 무학산도 한몫했다.

지금과 같은 기술보다 장대한 기골이 우선이던, 생활 씨름이 주를 이뤘던 1920년대 초. 이북을 비롯해 강원·경상도 씨름인이 돋보인 걸 두고 씨름인들은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들판 많은 곳보다는 험한 산 있는 곳 사람들이 그러한 체격(장대한 기골)에 좀 더 가까웠을 것이다."

실제 씨름은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들은 "산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곧잘 말한다. 수많은 씨름인을 배출한, 서원곡 씨름장이 무학산 입구에 자리 잡은 것만 봐도 그렇다. 오래전부터 무학산은 마산 씨름인의 연습 터전이었던 셈인데, 선수들은 잔걸음으로 산을 오르며 체력을 길렀고 빠른 발을 바탕으로 기술을 익혔다.

이윤진 창원시청 씨름단 감독 말을 들어보면, 마산 씨름인에게 무학산이 주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무학산을 곁에 둔 건 정말 축복이죠. 1970년대, 아니 그전에도 실내 씨름 연습장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모든 씨름 선수가 야외에서 훈련해야 했던 셈인데, 야외 훈련은 계절을 많이 탈 수밖에 없죠. 특히 겨울에는 더 그렇고요. 마산은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잖아요. 언제든지, 겨울철에도 마음 놓고 훈련할 수 있는 무학산이라는 훈련장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산악 훈련이 발전했죠. 씨름 선수에게 중요한 것들이 지구력과 체력, 속도, 허리, 하체 등인데 등산을 하면 모두 길러져요. 초·중·고, 대학, 일반부 가릴 것 없이 마산에서 씨름을 배운 이들이라면 모두가 수시로 무학산을 올랐죠."

모든 선수가 한데 모여 훈련하는 '연대훈련'은 무학산 정기를 받은 마산 씨름인을 한층 더 성장하게 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1960∼1970년대에는 연대훈련이 특히 끈끈했다고 한다. 학년·학교 구분 없이 지역 씨름인이 모두 모여 이 사람도 잡아보고 저 사람도 잡아보며 기술을 나눈 것이다. 이러한 훈련문화 속에서 기술이 자연스레 전수됐고, 이만기·강호동의 배지기·들배지기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를 두고 지역 씨름인은 "최고 선수에게 다리 한 번 넣어보면 대한민국 사람한테 다 해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이윤진 감독 말도 같다.

"선수끼리, 특히 선배들이 후배들 씨름을 보며 기술을 전수하는 거죠. 연대훈련에는 당대 씨름인들의 역할이 컸어요. 김성률·황경수·백승만 장사 등이 친분이 두터웠던 덕분에 제자들이 한데 모일 수 있게 된 거죠.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 마산 씨름은 선배들과 함께 훈련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죠."

연대훈련으로 기술을 나눈 마산 씨름은 특유의 근성까지 더하면서 날로 향상됐다. 이러한 세월 속에서 초-중-고-대학으로 연계 육성 시스템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마산무학·교방초-마산중-마산용마고-경남대까지 씨름인이 끊임없이 배출되면서 창원은 '씨름의 성지'로 그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씨름 성지 창원을 낳은 건 환경과 사람이다. 왼씨름과 무학산, 연대훈련 등 환경이 성지 기틀을 다졌다면 이를 알린 건 역시 사람이다. 김성률·이승삼·이만기·강호동. 이들 덕에 창원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씨름의 본고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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