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노동·비용 갈등 반복에 '푸짐한 상차림 피하자'확산
간소하게 차려 차례 지내고 가족여행·외식·영화 감상도

10년 전부터 차례상 음식을 줄이겠다는 어머님은 올해도 튀김·전만 8가지를 준비하고 오색 나물과 종류별 생선을 마련했습니다. 명절 연휴 동안 먹고 싸가면 질려서 또 어떻게 먹나요? 냉동실을 열어보니 지난 추석에 넣어둔 산적과 생선이 그대로입니다. 가족과 즐기고 싶은 명절 연휴에 기름 냄새에 찌들리고 상차림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그런데 요즘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명절 연휴가 3040세대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미리 산소를 찾고 연휴에는 가족 여행을 가고, 차례상 음식을 간단하게 준비하니깐 가족이 어울리는 시간이 늘고요. 차례상 간소화로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 가족을 소개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우리도 올해부터 조금씩 바꿔보아요."

◇제철 과일 간소한 차례상

꽃, 향, 맑은 물 한잔, 제철 과일 3~4가지, 떡 한 접시가 차례 음식 전부다.

최용호(81) 진주문화예술재단 전 이사장은 20여 년을 제철 과일로만 간소하게 차례상을 차리고 있다. 최 전 이사장은 불교 공부를 통해 조상을 섬기는 것은 후손의 당연한 임무인데, 격식과 물질에 속박돼 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데 문제를 인식했다. 진작 뜻이 있어도 위에 어른이 있을 때는 언행이 조심스러웠다. 1990년대 중반 최 이사장이 집안의 제일 어른이 되고 삼 형제가 결혼해 새 식구를 들이게 되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최 전 이사장 가족은 가족이 모여 먹을 음식은 간소하게 준비하지만, 기제사나 차례상을 위한 음식은 하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명절에 가족 모두 제주도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차례를 지냈다.

"향교에서 유교 전통을 보전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일반 가정에서 형식에 매달려 가정 불화를 조성하는 것은 생각해볼 때가 됐다는 거지요. 그 계절에 나는 음식을 간소하게 차려놓고 조상을 흠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 제사상을 어떻게 차려야 하고 제사장을 어떻게 봐야 한다는 것에 매이면 안 됩니다. 거창한 형식이 안 바뀌고는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

◇튀김할 시간에 영화 보지요

정효진(38·창원시 의창구) 씨는 동네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명절 연휴 전날 특히 손님이 많아 바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음날 시집에 가면 쉬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둘이서 종일 튀김·전 등을 부치고 나물과 탕국 등을 준비했다. 설 당일 손님맞이까지 마치고 나면 저녁에야 친정 갈 채비를 할 수 있었다. 정 씨는 명절마다 남편과 정말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명절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어머니가 설을 앞두고 갑자기 "그래, 네 말대로 올해부터 튀김과 전은 사보자!" 하고 선언한 것이다. 다른 음식 양도 같이 줄였다. 간소하게 설 명절을 보낸 정 씨네 가족은 지난 추석 연휴 때는 영화를 보고, 여유롭게 저녁 외식까지 즐기고 왔다.

"음식은 정성이라던 어머님도 음식을 줄이고 사는 것이 더 좋더라고 지인들에게 얘기하고 있어요. 먹고살기 어려운 시기에는 제사 후 주변 사람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게 풍습이었다지만, 이제는 시대가 다르잖아요. 영화 예매 시간까지 남은 일을 끝내려니 남편도 나서서 부엌 일을 찾는 등 변화도 생겼어요. 올해도 24일 영화 예매를 했는데요, 차례상 음식 변화가 명절 분위기를 확 바꿨어요."

▲ 제철 과일과 떡 한 접시로만 간소하게 차린 최용호 진주문화예술재단 전 이사장 가족의 차례상.  /최용호 씨 가족
▲ 제철 과일과 떡 한 접시로만 간소하게 차린 최용호 진주문화예술재단 전 이사장 가족의 차례상. /최용호 씨 가족

◇명절이란 여행 가기 좋은 때

김수진(43·김해시 진영읍) 씨 가족은 지난 주말 시아버지 산소를 찾아 인사하고 설 연휴기간 시가를 방문하지 않는다. 명절에 시집을 찾지 않는 건 올해로 5년째다. 시집과 갈등이 있어서가 아니다.

김 씨는 5년 전만 해도 명절에 여느 집과 다름 없이 전도 부치고 차례를 지냈지만, 늘 남는 음식 차림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상의 끝에 기제사만 지내고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어린이집 교사인 김 씨는 방학 며칠을 제외하고는 3일 이상 휴가를 쓸 수 없어 명절 연휴에 늘 가족 여행을 간다. 시어머니도 자유롭게 명절을 보내고 싶다며 흔쾌히 이해해줬다. 김 씨 가족은 주로 일본으로 여행을 갔지만, 한일 관계 악화로 올해는 동남아지역을 찾아봤다. 하지만, 춘절을 맞은 중국 관광객이 동남아지역으로 몰릴 것으로 보여 이번 설 연휴에는 국내 가까운 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굳이 가족 구심점을 제사와 차례에서 찾아야 할까요? 결혼한 남편 여동생이 있는데, 명절 연휴 지나서 따로 모임을 하기 때문에 서먹한 건 없어요. 틀에 짜인 대로 명절에 모여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가족이 돌아가신 아버지나 조상을 기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차례상 없애고 떡국 먹어요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남편과 함께 차례상을 준비한 조정림(44·창원시 마산회원구) 씨 가족은 지난해 추석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앞서 2년 전부터 기제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조 씨는 의관을 갖추고 까다로운 절차에 따라 제사와 차례를 정성껏 지낸 시아버지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조부모 마지막 기제사 때 시아버지가 이제 절에서 모시게 된 상황을 설명하며 울먹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례상을 준비하는 시간에 조기포전만 준비해 온 가족이 나들이 삼아 산소를 찾는다. 예전에는 조 씨 남편과 시아버지만 서둘러 산소를 다녀오곤 했다. 다음날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 전날 저녁에도 가족이 모두 여유롭게 쉬는 시간이 생겼다. 조 씨는 설 당일 간단하게 떡국을 먹고 일찍 친정에 갈 계획이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만 없어도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할 수 없어요.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제사인데 제사로 불화가 일어난다면 의미가 있을까요? 주변을 봐도 제사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어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이해하면 모두가 즐거운 명절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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