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 발표
올해 국가기념일 지정 계기로 피해자 증언·소통 급증 전망
"역사 한 장면으로 인정할 때 가해자도 진상규명 나설 것"

'부마민주항쟁은 40년 동안 왜 기념일로 지정되지 않았나', '기억은 어떻게 억압되고 또 어떻게 재생되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왜 40주년 기념사에서 책임자 처벌이 아닌 규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이은진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많은 의문을 쏟아내고 답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실무위원회 위원장인 이 교수는 "부마항쟁은 사적 기억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시작 단계에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민주화 기여 인정을 넘어 이기화된 사회적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교수는 '부마민주항쟁의 기억과 기념' 주제 발표를 통해 시기별로 부마민주항쟁이 기억되고 기념되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부마항쟁은 체험과 기억이 모두 억제된 상태에서 발생했다. 사건 즉시 계엄령이 발동되고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가운데 10·26사태가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망은 부마항쟁이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고 기록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그 실상이 기록되고 기억되기에는 당시 상황은 너무나 절박하고 유동적이었다. 이 교수는 "1987년까지 유신체제와 유사한 전두환 군부 정권 체제에서 시민 자유는 극도로 억압되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지는 못해 지역에서는 부마항쟁을 기록, 기념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인 민주화 분위기 속에 부마항쟁 10주년 기념행사(1989년)가 치러졌지만 공식적으로 진상규명과 역사적 논의가 이뤄지기에는 부족했다. 20주년(1999년)에는 '부마사태'가 '부마민주항쟁'으로 바뀌어 명예회복이 되었지만, 진상규명 요구는 성과가 없었다.

이 교수는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했다고 알린다고 이익을 볼 게 없어서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20년이다.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되었지만 권력 집행 기관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다. 한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과거사법 제정에 따라 부마항쟁에 대한 공식적 판단이 내려지지만, 그동안 언론 통제·축소 보도 탓에 2008년 부마 인지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조사)는 부산·울산·경남 지역은 5%, 전국은 1~2%였다. 2008년은 부마항쟁 3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이다.

▲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렸다. 이은진(맨 오른쪽)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렸다. 이은진(맨 오른쪽)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2012년 부마항쟁특별법 제정을 위한 광범위한 연대체가 구성되고,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가 10월 15일 마산에서 부마항쟁에 대해 처음으로 전향적인 발언을 하면서 이듬해 부마민주항쟁법이 제정됐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설치됐지만 권한과 예산, 인력 등 정부 협조는 잘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1989년, 1999년, 2009년 시대 상황에 따라 기억과 기념에서 부각하는 점이 달라질 수 있다. 올해는 부마항쟁 40주년이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해다. 그동안 나서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증언이 폭발적으로 늘 것 같다. 증언은 어느 정도까지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역사적 사실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고 밝혔다.

현재의 관점은 과거의 재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고, 개인의 기억이 파편적이라는 점을 전제로 역사적 실체를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은 것이다.

이 교수는 "진상조사는 공적 자료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 폭력은 공적인 자료에 드러나지 않아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부마항쟁 위치를 보면, 이제 개인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통하기 시작했고 이를 모아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옥정애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 위원(경남대 재학 당시 항쟁 참여)은 시위 가해자 증언을 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이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40주년 기념식에서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겠다고 했다. 처벌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을 규명하고자 증언을 듣는 것이지 처벌을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면 된다. 사회적 분위기 또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인정할 때 가해자들도 나설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시위 참여자 중에서도 방화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서지 않고 있다. 폭력과 방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등 사회적 윤리 문제가 따른다. 부마항쟁이 역사적 서술로 들어가는 순간 사회적 합의와 논란이 많아진다. 하나씩 풀어나갈 문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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