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출신의 한경호(57)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은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으로 경남도민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지방행정공제회에서도 ‘발로 뛰는’ 현장 경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한 이사장은 내년 총선 진주지역 출마 여부에 대해
“권한대행 시절 업무능력 등을 좋게 평가하는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한경호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경남도민일보 DB
한경호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경남도민일보 DB

공부 꼴찌 하던 아이가 도지사 권한대행으로

Q. 진주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출생지, 출신학교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62년 진주 옥봉남동이란 곳에서 태어나 수정초등학교, 진주남중, 진주고, 경상대를 나왔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어요. 부모님이 장사 등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어릴 때 친구 중 대학에 간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그만큼 다들 어려웠던 거죠. 저도 공부는 관심 없이 공만 열심히 찼던 기억이 납니다. 잠잘 때 축구공을 보듬고 잘 정도였으니까요. 또 성격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제가 공무원이 돼 사천시 부시장, 경남도지사 권한대행 등으로 돌아오니 주변에서 다들 충격이었죠. 공부도 만날 꼴찌고 보이지도 않던 친구가 그렇게 나타나니 놀랄 만했죠.”

Q. 1984년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습니까.

“고등학교 때까지는 직업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집안에 공무원도 없었고 공무원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대학에 가서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서울 쪽 대학에 간 친구들을 보며 내 인생은 뭔지, 나도 못 할 게 없는데, 깨달은 게 있었죠. 그때 경상대 농학과 1학년 지도교수인 김석현 교수님이 기술고시(농업직)에 응시해보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진주고를 나와 성적도 상위권에 들고 저를 좋게 본 거죠. 김 교수님뿐 아니라 학과 전체가 저한테 공부 공간까지 내주며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줬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 대학 재학 중에 시험에 합격해 공직의 길을 걷게 됐고요. 우연찮은 시작이었지만 운명이 됐습니다. 막상 공직에 들어와 보니 제 성격, 특성, 국가관과 잘 맞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끔 사주를 보러 가면 맨 먼저 듣는 이야기가 국가 녹을 먹는다는 건데 어쩔 수 없는 운명이구나 생각했습니다. 33년 동안 국민을 섬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민께 봉사하며 공직생활을 해왔기에 후회는 없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Q. 공무원이 돼 첫 근무지는 어디였고 이후 어떤 곳에서 주로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기술고시 합격 후 군대를 가 1989년 경남도 농어촌개발과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농업직이 천대받는 직렬이라 승진이 잘 안 됐습니다. 고위직도 안되고 잘해야 과장에서 끝나는 처지였죠. 다행히 운이 좋았습니다. 농업직 사무관으로서 열심히 일했고 덕분에 윗분들이 저를 좋게 봤어요. 1997년 김혁규 지사 때 그렇게 농업정책과장(서기관)으로 발탁됐고 이후 도정의 핵심인 기획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농업직은 맡기 어려운 자리였는데 파격적 인사였고 행정직 등으로부터 상당한 질타와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2002년 사천시 부시장으로 가게 됐는데 김혁규 지사와 현재 국회의원인 박완수 국장 등이 중앙부처에 가라는 권유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 행정자치부로 전출 가라는 거였는데 솔직히 싫었습니다.”

Q. 왜였나요. 결국은 행자부로 간 걸로 아는데요.

“자신이 없었습니다. 서울 쪽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경남에서 사천 부시장에 이어 진주 부시장 등을 역임하면 승진도 하고 나름 탄탄대로인데 굳이 갈 이유가 없었죠. 기술고시로 공무원이 돼 고생을 많이 하고 적응이 어려웠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 행자부에 가니 존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경남에서는 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는 인정받기도 어렵고 텃세도 엄청 셌습니다. 적응이 안 돼서 국무총리실로 아예 옮겼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4년간 총리실에서 일했는데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행정자치과장으로서 주말도 밤낮도 없이 일만 했습니다. 워낙 민원이 많아 힘들고 다들 가기 싫어하는 자리였어요. 다행히 총리실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도 하고 행자부로 복귀해서 재정기획관, 장관 비서실장, 지방분권지원단장 등 중책을 맡을 수 있었죠.”

지난해 1월 밀양 세종병원 화재참사 현장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방문 중인 한경호 당시 경남도지사 권한대행 (맨 왼쪽) /지방행정공제회
지난해 1월 밀양 세종병원 화재참사 현장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방문 중인 한경호 당시 경남도지사 권한대행 (맨 왼쪽) /지방행정공제회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 행정 패러다임으로

Q. 이후 세종시 행정부시장을 거쳐 지난 2017년 경남도 행정부지사 겸 도지사 권한대행으로 돌아왔습니다. 뜻깊은 순간이었을 거 같은데 약 1년의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경남에서 공직생활의 마지막을 보내는 게 꿈이었는데 뜻대로 안 됐죠. 현 국회의원인 윤한홍 부지사, 류순현 부지사가 먼저 발령을 받았고 전 포기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기회가 왔습니다. 경남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해 경남도 부지사로 공직을 마무리한 사람은 아마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전 제 능력을 압니다. 남보다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어서 경쟁에서 이기거나 최소한 대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남도에서도 그렇게 했는데 물론 노조나 공무원들은 싫어하더군요.(웃음)”

Q. 홍준표 전 지사가 대선 출마를 위해 지사직을 내려놓은 직후였고 또 정권 교체까지 이어졌으니 더욱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정치적·행정적으로 무척이나 복잡했고 미묘한 시점이라 중심을 잘 잡고 현안문제 해결에 역점을 뒀습니다. 나름 성과도 있었지만 권한대행의 한계로 부족한 점도 많이 있었죠. 지난해 밀양 세종병원 화재사건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로 남아 있습니다. 가장 심혈을 기울 부분은 행정 패러다임을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꾼 것입니다. 국정과제로 선정된 9개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9개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도민 중심으로 운영했는데, 저소득층, 장애인, 노인 등 취약계층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도민행복위원회’ 신설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침체된 조선업 정상화에 최선을 다한 결과 STX 등이 위기를 모면하고 거제 등 조선산업 관련 지역이 고용위기특별지역 및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된 것 등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경남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추진한 ‘가야사 연구 복원추진단’ 설립, ‘남명 조식 선생 선비정신 계승사업’ 등도 주력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6월 건설전문 일간지 '건설경제'에 실린 한경호 이사장 관련 칼럼. /지방행정공제회
지난 6월 건설전문 일간지 '건설경제'에 실린 한경호 이사장 관련 칼럼. /지방행정공제회

지방행정공제회 묵은 관행을 혁파하다

Q. 지금 몸담고 있는 지방행정공제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지방행정공제회는 지방공무원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위해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기관입니다. 1975년 설립돼 올해 44년째가 됐으며 지방공무원 28만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습니다. 가입은 개개인 자율이지만 가입률은 96%에 달합니다. 교직원·군인·경찰 등도 공제회가 있는데 지방행정공제회는 자산 규모 13조 원으로 이들 중 2위 수준입니다. 회원을 위한 공제 제도로는 퇴직급여, 분할퇴직급여, 한아름목돈예탁급여, 대여 등이 있고요. 자산 규모가 크긴 하지만 조직 및 인력, 시스템 등은 아직 그에 걸맞지 못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작년 9월 부임 이후 정원을 10명 증원했고 자산규모 20조 원의 새로운 시대를 대비해 조직 컨설팅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이사장 취임 당시 회원 서비스 혁신, 경영 혁신, 조직문화 혁신 등을 강조한 게 기억납니다. 

“취임 후 많은 일이 있었는데 지난 5월 초 미국 캘리포니아 교직원연금(CaLSTRS)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1대 1 공동투자를 하기로 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는 단순 업무협약이 아닌 국내 최초로 미국 2위 연기금과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투자 협약을 체결한 것이었어요. 총 투자액 8800억 원으로 해외투자 방식의 혁신적 전환점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주요 자산운용사를 방문한 이후 미국 현지 여러 운용사에서 투자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과거 해외투자 시에는 정보 부족 등으로 국민연금이 선행 투자를 하면 우리가 따라가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직접 선도·발굴해 우량 투자사업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취임 후 지방행정공제회와 거래하는 증권사·운용사를 총 20차례 방문해 상호협력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나가기로 뜻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 내년 초로 예정된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사업을 비롯해 조직 문화와 직원 처우 개선 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Q. 얼마 전 한 언론에 ‘한경호 이사장의 관행 깨기’란 칼럼이 실렸던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투자사 직접 방문 등을 이례적으로 평가하더군요.

“우리 공제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지방공무원들이 보내주는 회비로 투자 등을 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소극적이었어요. 증권사 등에서 투자 권유를 하면 수동적으로 하는 게 전부였죠. 이건 아니었습니다. 전 직접 그들을 찾아가 좋은 투자처를 알려달라고, 수익을 많이 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저 돈만 대주는 곳이 아니라 전략적 동반자 관계, 함께 윈-윈하는 관계로 재편한 거죠. 그래야 100원의 이익 창출할 게 110원으로 올라가고 하지 않겠습니까.”

Q. 경남도지사 권한대행 때 강조했던 현장행정·소통행정과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게 아니라 제가 행정 쪽에 있을 때, 부지사 등으로 있을 때 공직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의도 자본시장 쪽에서는 이런 게 익숙지 않으니 특이하게 보는 거죠. 나름 이단아로 불리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투자하는 곳이 200곳이 넘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어선 안 되죠. 좋은 물건을 어떻게든 찾아내야죠. 개인적으로 그래서 경제 및 금융, 자산운용 관련 분야 공부도 많이 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일반 행정업무만 계속해오다 보니 전문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죠. 부족한 부분은 우리 사업이사, 개발사업본부장 등을 비롯한 내부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자산운용사 대표 등에게 시장동향, 투자방향, 리스크관리에 관한 조언을 수시로 경청하고 경영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CEO로서 조직을 관리하고 조정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행정공제회는 29만 회원을 대표하는 운영위원회, 대의원회 등 의결기구와 관계도 중요하기 때문에 협치 측면에서 각별히 신경도 쓰고 있고 지도감독기관인 행정안전부와 관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한경호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경남도민일보 DB
한경호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경남도민일보 DB

내년 총선 진주 출마설, 감사하게 생각

Q. 민감한 질문입니다만 내년 총선에서 진주 쪽 출마설이 끊이지 않습니다.

“경남지사 권한대행 때 남부내륙철도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조기 착공 필요성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남명 조식선생 기념사업, 가야문화 복원, 소외계층에 대한 체계적 지원 등 많은 일에 정말 열정을 쏟으며 열심히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인지 지방선거나 총선 출마설이 지역에서 가끔 거론되는데 권한대행 시절 업무능력 등을 좋게 평가하는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으로 역할과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기 내 자산 15조 원 달성, 안정적인 자산운용 등 목표를 이루고 그 뒤에 일은 그때 또 고민할 생각입니다.”

Q. 앞으로 삶의 계획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중장기적으로 특별한 계획은 없는 거네요.

“요새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이 ‘나는 자연인이다’입니다. 그걸 보고 동경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는 ‘택도 없는 소리 말아라’고 하더군요. 자신은 가기 싫다며.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거 같아요. 하고 싶다 해서 하고, 하기 싫다 해서 안 하고, 이런 게 안 되잖아요. 항상 준비는 하지만 뚜렷한 목적을 갖지는 않습니다. 3년 임기 동안 공제회를 잘 이끌면 또 다른 길이 나오겠죠. 열심히 살아왔고 350만 도민의 대표로 경남도도 이끌어봤고 앞으로 어떤 길이 놓이든 그게 자연인이든 뭐든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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