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겪은 천재예술가
흑인전용 식당서 즉석공연
쇼팽 '연습곡'의 '겨울바람'
부조리 꼬집듯 흐르는 걸작

영화 <그린북>은 2018년 골든글로브 3관왕을 차지하고 이어 2019년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석권한 수작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비참함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일까? 아마도 차별 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일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견디다 결국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 버린 이들만큼 불행한 이들이 있을까? 만약 저 먼 우주에 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있어 지구인과 누가 더 천박한 존재인가를 논하는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인간이 자행해 온 차별의 역사가 그들이 더욱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논거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다름이란 단어에 어떠한 우위를 표현하는 바가 없음에도 다르기에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주는 폭력성은 한 개인을 넘어 인류를 파멸시킬 악마와도 같다. 이에 영화 <그린북>은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다른 세상을 살아가던 두 남자가 편견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잔잔히 보여주며 우리 속의 악마를 지워가려 한다.

▲ 셜리(오른쪽)가 흑인전용 식당에서 즉흥연주를 하고 있다.  /스틸컷
▲ 셜리(오른쪽)가 흑인전용 식당에서 즉흥연주를 하고 있다. /스틸컷

◇차별과 편견

1962년, 클럽에서 일하는 입담 좋고 완력 강한 해결사 '토니', 그는 이태리계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클럽이 잠시 문을 닫게 된 사정으로 단기 실업자가 된 그는 생계를 위해 이제 곧 미국 남부로의 연주투어를 떠나는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어색한 분위기의 면접 끝에 이제 투어를 함께 떠나게 된 상남자 토니와 교양으로 똘똘 뭉친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셜리. 끊임없이 먹어대며 입담을 펼치는 토니의 운전석과 무릎에 담요를 두고 사색에 잠기는 셜리의 뒷좌석은 서로 다른 세계며 무엇 하나 닮은 점이라고는 없는 둘의 여정이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가운데 다름에 기인한 재미있는 때로는 슬픈 해프닝들이 벌어진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두 남자의 위치를 말해 주듯 가판대 아래 떨어져 있는 비취석을 두고 벌이는 둘의 신경전, 미국을 대표하는 닭 요리에 신이 난 토니와 그의 강권에 결국 그것을 받아 들고 생전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셜리, 먹거리와 편견에 대한 대화가 오간 후 남은 뼈를 창 밖으로 버리는 것은 웃으며 동참하지만 콜라 컵마저 버리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못해 차를 후진시키는 셜리, 비가 퍼붓는 날, 길을 잃어 만난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차별과 로버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동생)라는 어마어마한 인맥에도 세상에서는 그저 한 명의 흑인으로 차별 당할 수밖에 없으며 평생 그런 대접을 참아 온 셜리, 차가 고장 나 잠시 섰던 길, 앞 좌석의 백인과 뒷좌석의 흑인 모습을 구도가 맞지 않아 불편한 그림을 바라보듯 응시하던 농장의 일꾼들.

이렇듯 소소하지만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다 이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지막 공연 장소인 호텔. 친절히 맞이하는 호텔 지배인은 창고 같은 탈의실로 셜리를 안내하고 토니는 먼저 식당으로 향한다.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셜리와 그를 가로 막는 웨이터, 그리고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 이 곳에서 공연은 할 수 있어도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연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빠져 나온 둘은 이제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식당을 찾는다. 흑인들로 가득한 그곳은 이제 토니가 이방인이며 그곳에서 연주를 부탁 받은 셜리는 피아노로 향한다. 그리고 보란 듯 멋진 즉석 공연을 펼치곤 집으로 향하는 그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고픈 셜리는 피곤에 지쳐 잠든 토니 대신 운전대를 잡아 집으로 데려다 준 후 자신의 거처 카네기 홀에 도착하지만 외로운 크리스마스 이브다. 곧 가족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토니의 집에 노크소리가 들리고 그곳을 찾은 셜리는 이제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과 친구가 되려 한다.

▲ 셜리(왼쪽)와 그의 운전기사 토니. /스틸컷
▲ 셜리(왼쪽)와 그의 운전기사 토니. /스틸컷

◇겨울바람

식사를 거부하는 호텔에서의 공연을 뭉개버리고 그들이 찾아간 식당, 그리고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는 토니의 소개에 대답 대신 연주를 보여 달라는 웨이터, 이에 평소 스타인웨이만을 고집하던 셜리는 식당의 허름한 피아노 앞에 앉고 멋진 선율로 식당 안 모든 이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이 곡은 바로 그가 평소 자신 있어 하던 폴란드가 자랑하는 작곡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연습곡(Etude)' 중 '겨울바람'(Op.25, 11번 a단조)이다. 4분가량 소요되는 곡을 영화에서는 첫 부분과 하이라이트 부분 정도로 짧게 들려주는 것이다.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 19세기 중반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대중화되던 시기였다. 우리도 한때 집에 피아노 한대쯤은 갖춰 놓는 것이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유럽은 이미 1세기도 더 이전에 이러한 시대를 지나온 것인데 당시의 시류와 함께 등장한 것이 바로 '연습곡'이라는 장르로 입문자와 프로연주자 모두에게 꼭 필요한 시대적 요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연습곡은 연습곡일 뿐, 초기의 작품들은 단지 테크닉을 위한 무의미한 음표의 나열에 불과했다. 하지만 곧 이를 넘어 정서적 고양과 예술적 감흥을 요구하는 진정한 작품으로서의 연습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가 만들어낸 걸작 중 하나가 바로 '쇼팽'의 '연습곡'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단지 집에서 혼자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한 것이 아닌 콘서트 홀에서 청중들에게 정서적인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만큼의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기교와 정서의 조화를 최고의 예술로 여겼던 쇼팽이기에 가능했던 위대한 업적이다. 두 차례에 걸쳐 출판된 작품번호 10번의 12곡과 작품번호 25번의 12곡, 총 24곡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 제목을 지닌 곡들이 특히 유명하여 소개하자면 돌아가지 못하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향수를 그린 서정적 쇼팽의 대표 히트작이라 할 '이별의 곡(Op.10, 3번),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의 피아노 배틀 장면에 등장한 '흑건(Op.10, 5번)', 조국 혁명군의 패배와 바르샤바 함락에 격분하여 만든 애국심의 발로 '혁명(Op.10, 12번)', 햇빛에 부서지는 나비의 파닥임을 묘사한 '나비(Op.25, 9번)',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낭만주의의 최고봉에 우뚝 선 매서운 '겨울바람(Op.25, 11번)' 등이 있다. 나머지 곡들 또한 그 작품성과 아름다움에서 뒤지지 않기에 전곡을 찬찬히 들어 본다면 왜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최고급 피아노 스타인웨이 앞에 앉은 셜리.  /스틸컷
▲ 최고급 피아노 스타인웨이 앞에 앉은 셜리. /스틸컷

◇불편한 친절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친절이다. 그들은 친절하게 차별하며 연주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예술성도 얼음처럼 차가운 편견을 녹여내지 못한다. 셜리에게 보내는 박수갈채가 오히려 야유처럼 들리며 살갑게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하는 경찰의 친절도 비딱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영화 <그린북>은 차별에 대한 고발과 그 치유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편견에 대한 편견'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편견, 다시 말해 피해의식. 오랫동안 억압과 차별을 받아 온 이들에게 존재하는 또 하나의 천박한 악마다. 굳이 스타인웨이만을 고집하며 한사코 치킨을 거부하는 셜리, 이는 상황에 관계없이 최고의 피아노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차별일 것이라는 그리고 흑인의 음식을 천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또 다른 편견인 것이다. 세상에 남아 있는 차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나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는가? 하니 쟁취한 것은 즐기며 싸우자. 피해의식의 발로에서 오는 트집은 오히려 선한 곳으로 향해 가는 발목을 잡는 행동이기에 말이다. (결코 피해의식을 심어 준 자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런 생각에 영화 <그린북>의 수상에 반대하며 시상식에서의 퇴장 해프닝을 보여준 흑인 감독의 행동은 씁쓸함을 남긴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토니처럼 쿨(Cool)해 보시라 권하는 바이다.

'난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자나 스파게티만 먹는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데….'

※ 이 기사는 경상남도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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