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 1억 모금해 1982년 출범
초기 적응 어려움 겪었지만
1989년 전국체전 우승 성과

1980년대 마산을 넘어 경남 야구가 맞은 획기적인 사건은 '경남대학교 야구부' 창단이었다.

경남대가 야구부 창단을 준비한 건 종합대학 승격 직전인 1981년 말이다. 경남대는 그해 10월 27일 대학체육진흥위원회를 구성해 야구부 창단 계획을 구체화했다.

경남대 교수와 동문이 주축이 된 위원회는 '체육을 통한 교기 진흥으로 전 경남대인 일체감 조성과 교위 선양'을 야구부 창단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기금 모금 활동 등을 펼치며 야구부 창단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는데, <마산시 체육사>에 따르면 경남대 동문회만 하더라도 1982년 8월 무렵까지 기금 1억 원을 모았다.

창단 감독은 정연회 당시 경남고 감독이 맡았다. 이어 1982년 말에는 천안북일고·휘문고·부산상고·배재고·경남상고를 주축으로 한 창단 멤버 23명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부푼 꿈을 안고 경기장으로 나섰을 경남대 야구부였지만 창단 초기 적응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학 2학년생 이상 선수와 신입 고교스타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시됐던 당시 대학야구 판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 1982년 10월 경남대 야구부 창단식 모습.  /경남대
▲ 1982년 10월 경남대 야구부 창단식 모습. /경남대
▲ 1982년 10월 경남대 야구부 창단식 모습.  /경남대
▲ 1982년 10월 경남대 야구부 창단식 모습. /경남대

경남대는 1983년 4월 '제33회 백호기쟁탈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실업팀 상업은행을 패배 직전(최종 스코어는 7-9 패)까지 몰며 분전했지만, 창단 7개월 만인 그해 5월에서야 첫승을 달성했다. 1983년 '제17회 대통령기쟁탈 전국대학야구대회' 1회전(16강)에서 경남대는 인천전문대와 맞붙어 6번 타자 신용섭 솔로 홈런으로 기선을 잡았다. 그리고 5·6회 집중 8안타로 8점을 보태며 13-7 승리를 거뒀다. 물론 경남대는 8강에서 만난 동아대에 2-10으로 패하며 준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첫 승리를 맛보며 도약 발판을 다진 셈이다.

창단 초기 보낸 인고 시간은 1980년대 중·후반 성과로 나타났다. 1987년 경남대는 '제37회 백호기쟁탈 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후보 건국대를 10-4로 대파하고 8강에 오르는 가하면, 1989년 '제70회 전국체전'서는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후 2003년 '대통령기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명맥을 이어갔다.

<경남대학교 70년사>는 학교 야구부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대학교 야구부가 출범한 1982년은 프로야구가 시작된 해다. 야구는 많은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로 곧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대학교 야구부에서도 많은 우수 선수를 배출해 한국 야구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대학교 70년사>, 경남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경남대학교, 2016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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