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만의 조선시대 중요 유적지
지역 관광자원으로 살아나길

제포(薺浦)의 현재 위치는 진해구 제덕동 일원 연안으로, 진해만을 통해 대마도가 곧바로 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포구였다. 조선시대 초기 이곳 제포 연안에 중요한 시설이 자리하게 된다.

고려 말기부터 약탈을 일삼던 왜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왜구에 대비한 경상도 수군의 편제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어 수군본부(水軍都按撫處)를 두고, 예하부대(水軍萬戶)를 두었다. 당시 '제포'는 경상우도수군만호(慶尙右道水軍萬戶)가 설치된 포구로 병선 9척과 수군 882명이 상주했던 '제포진(薺浦鎭)'이 자리했던 곳이다. 진지를 조성한 성곽의 길이가 300보 정도이며, 성곽 내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10동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 지금의 군병력으로 가늠해 보면 연대급 규모의 부대가 상주한 곳이다.

조선시대 초기 왜구 침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일교섭을 추구하여 15세기 초반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현저히 감소함과 동시에 남부 연안 각 지역에 교역하는 왜인의 수가 급증하였다. 왜인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위해 지정한 포구에서만 활동하도록 정한 곳이 '포소(浦所)'이다. 군사 방어적 이유와 함께 왜인의 왕래로 인한 여러 문제점을 근절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경상도 좌·우도에 도만호가 설치된 포구 한 곳씩, 두 곳을 정하였다. 우도는 내이포(제포의 당시 지명), 좌도는 부산포를 포소로 지정하였다(1507년). '포소'와 함께 사용되는 '왜관(倭館)'은 왜인들이 통상을 하던 무역처라는 의미와 '포소'의 의미가 포함되어 사용되고 있다.

당시 왜관에서 생활한 왜인들의 유형은 사신으로 외교업무를 담당한 '사송왜인(使送倭人)', 무역 교역을 위해서 온 '흥리왜인(興利倭人)'과 이곳에서 생활하며 정착한 '항거왜인(恒居倭人)'으로 구성되었다. 사실상 왜관은 본토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이주한 사람들로, 대부분 상업과 농사 및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한 조선시대판 왜인타운이라고 볼 수 있다. 제포왜관의 거주인구는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약 2000~3000명으로, 조선에 있는 왜인마을(倭里) 중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제포왜관이었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왜관지역을 중심으로 했지만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경상도 연안과 낙동강 유역에 이를 정도로 활발하였다. 농사 활동은 개간을 통해 토지를 경작하다가 점차 고리대·매매를 통해 소유하고 경작하여 조선정부에서 왜인의 토지에 대한 세금도 부과할 정도로 상당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온 왜인 승려들이 세운 사찰의 수가 11개에 이를 정도로 생활이 윤택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상거래 교역 통제에 불만을 품은 항거왜인과 대마도에서 출정한 왜구가 합세하여 민가를 불을 지르고 백성을 죽이는 난리를 일으킨 것이 이른바 1510년에 발생한 '삼포왜란'이다. 이로 인해 왜관이 일시 폐쇄되었다가 1512년 다시 개관하여 1544년까지 왜인들이 생활한 곳이 '제포왜관'이다.

얼마 전 조선시대 최초 개항장이었던 제포왜관 터가 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제포왜관은 제포진성과 함께 사대(事大)·교린(交隣) 및 국방정책 공간이 실현된 유적지이다. 이러한 역사·문화 콘텐츠들이 사장되지 않고 역사관광자원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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