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웠던 입단 그리고 인생이 된 취미

나날이 올라가는 온도가 무섭게 느껴질 만큼 어느새 여름은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금세 얇아져 버릴 옷차림이 걱정되는 한편, 아침저녁으로 길어진 해와 저녁 무렵의 선선한 온도가 주는 즐거움은 다가올 여름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소하지만 긴 여운을 주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어느새 내 마음은 계절의 흐름 보다 앞서 나가게 된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가볍게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짧지 않은 시간 대화를 한 것 같은데 해가 길어진 탓인지 카페 밖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한낮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집으로 바로 향하기가 아쉬워 친구와 함께 근처 호수를 산책하게 되었다.

항상 늦게까지 사람이 많은 곳이긴 했지만 그날 밤은 유난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 듯했다.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과 운동하는 사람들, 상가의 밝은 네온사인으로 인해 호수 주변은 확실히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이었다.

▲ 김혼비 작가의 일반인 여자 축구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장참미 시민기자(오누이북앤샵 대표)

◇특정한 경험과 인지

그런 분위기는 내 발걸음마저 달뜨게 만들었고, 나와 내 친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체 호수 주변을 두어 바퀴쯤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똑같은 코스를 반복해 걷고 나서야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내가 걷는 곳의 배경처럼 묻혀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돗자리와 벤치에 앉아 먹거나 이야기하는 가족과 연인들, 반려동물과 함께 나온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편안하고 안온한 얼굴들을 하고서 자신의 여름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앞서 언급한 무리와는 조금은 다른, 한눈에 보아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달리고' 있는 많은 수의 여자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있어 세상은 내가 관심을 가진 대상 속에만 존재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을 열어야 눈도 함께 열리는 법.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경험을 거쳐야만 내가 인지하는 삶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마치 치아가 아프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치과 간판들이 연이어 보이고 수많은 글자들 사이에서 내 이름과 동일한 음절의 글자는 더 크게, 더 쉽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오래전부터 그 호수를 비롯해 어딘가에서 운동을 하는 여자들은 분명 존재해왔겠지만 적어도 내 삶 속에 그녀들이 굴러들어오게 된 것은 최근에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책을 읽은 후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 축구의 세계

2018년 민음사에서 출판한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는 일반인 여자 축구팀에 관한 에세이이다. 축구에 있어서는 완전한 문외한인 내가, 그것도 프리미어리그도, K리그도 아닌 여자 축구(심지어 선수 축구도 아닌 일반인 여자 축구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읽은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책'으로 입소문이 퍼지며 출판된 지 약 1년이 지난 시점에 나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실 책을 읽는 행위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어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오락과 유흥의 유혹들을 접어둔 채 활자에 집중해야 하며 때로는 노력 끝에 읽은 책이 나와 맞지 않으면 그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선택하는 면에 있어서 내가 관심이 없는 분야와 주제를 다룬 책들은 선택하는 일은 늘 어렵고 도전이 된다. 그 점에서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마이너적인 요소가 너무나 분명한 책처럼 보인다. 내 경우만 보아도 독서모임과 지인들을 통해 이 책을 세 번 정도 추천 받았음에도 읽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더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마지막 작가의 말에 있던 내용처럼 '일단 한 번 알게 되면 기절하게 재미있는 여자 축구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혼비 작가는 이 책에서 서두에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의 내용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정면 돌파

한 사람에게 어떤 운동하나가 삶이 중심 어딘가에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일이었다. 일상의 시간표가 달라졌고 사는 옷과 신발이 달라졌고 몸의 자세가 달라졌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다. 축구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내 몸 마음의 어떤 감각들이 깨어나는 걸 느끼면서 축구가 너무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끼면서 선수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다. "왜 진작 축구를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질문을 좀 더 엄밀하게 고치면 이렇다. "어렸을 때 우리는 왜 축구할 기회가 없었을까?" "우리는 정말 운동을 싫어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고 아쉬워하면서라도 이제라도 만난 넓은 피치 위의 세계를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공 하나에 웃고 울고 싸우고 서로가 서로의 팀이 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주제는 비주류일지 몰라도 책 속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중심을 정면 돌파한다. 작가에게 여자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수가 아닌 일반인 여자들이 만든 축구팀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팀들이 매우 많으며 아주 오랜 기간 진지하고 열정적인 방식으로 팀을 꾸려나가는 것에 놀란다. 그리고 그 반응은 왜 그녀들이 어쩌다 축구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자축구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중 일부. 장참미 시민기자(오누이북앤샵 대표)

◇몸에 새겨진 경험

김혼비(가명) 작가는 본인을 초개인주의자라고 칭하며 사람은 안 모일수록 좋다고 믿었지만 축구황제 호나우두의 스텝오버를 보고난 후 축구에 매료 되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축구를 위해 써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민 끝에 여자 축구팀 모집 공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가 일단 한 번 와보라는 말에 축구장을 방문, 엉겁결에 입단과 첫 경기를 동시에 치르게 된다.

먼저 입단해 있던 여자 축구 회원들 중 누구하나 거창한 이유나 목적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저 운동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며 입단 제의를 받고는 재미삼아 나왔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친구, 아들의 유소년 축구팀에 따라갔다가 감독에게 영업 당한 엄마, 그 엄마를 본 다른 학부모 엄마. 말로만 들어서는 다단계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그저 재미를 좇는 취미활동으로서의 축구가 아닌 몸으로 쌓아올린 또 다른 한 편의 인생과도 같은 그녀들의 축구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그런 그녀들이 하는 축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응원 독서

진짜 축구 경기를 하기도 전에 그녀들은 여자 축구를 향한 시선과 말들에 적절한 수비와 공격을 섞어가며 경기장 밖의 플레이부터 시작해야 한다. 축구장을 벗어나서도 계속 되는 그녀들의 경기. 그런 수고스러움을 그녀들은 왜 견디는 것일까.

이 책에는 여자 축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축구하기에 편한 짧은 머리, 근력과 체력향상을 위해 종아리의 알과 몸무게 증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들. 그녀들의 호쾌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취향에 무감하지 않은 우아한 태도를 읽어나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자 축구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딘가에서 열심히 땀 흘리고 있을 그녀들. 그녀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두고두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여름밤이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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