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기업체 회장이 34평 아파트에 혼자 사는 까닭

경남 대표 향토기업 무학

"저는 이 길을 꼭 가야겠다는 판단이 서면 스스로 중간에 발을 뺄 수 없도록 배수진을 치고 일을 시작합니다."

경남의 대표적 향토기업이자 종합주류기업인 ㈜무학을 이끌고 있는 최재호(57) 회장.

최 회장이 무학 회장에 취임한 것은 1994년이었다. 1996년 자도주 보호법 폐지를 앞둔 시점이었다. 자도주 보호법은 1개 시도별 1개 업체만 생산, 시장점유율 50%를 법으로 보장해주는 제도였다. 이 법이 폐지되면 모든 주류기업이 무한경쟁을 벌이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는 대기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대기업이 지방 소주 시장을 잠식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지 않았다. 시장의 변화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25도 소주가 일반적일 때 23도 소주 '화이트'를 시장에 내놓았다.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깬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무학'을 단종시켜버렸다. 거래처에서 반발했다. 인지도가 높은 무학을 단종하고 애주가들에게 생소한 23도 소주를 내놓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미래를 내다보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최 회장의 예상대로 화이트는 히트를 쳤다. 이듬해 자도주 보호법이 폐지되면서 다른 지역 소주 업체는 대기업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통폐합되어 시장에서 사라졌지만 무학은 '화이트'로 대기업의 공격을 이겨냈다.

이후에도 시련은 연이어 밀어닥쳤다. 울산이 경남에서 독립해 광역시로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경남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져 울산지역 매출이 급감했다. 또 IMF 구제금융 시기 무학도 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했다. 무학 자체의 경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지급보증을 섰던 관계 회사 때문이었다. 무학은 2년 남짓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고 울산지역 시장점유율도 점차 회복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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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호 ㈜무학 회장. / 박일호 기자

그리고 2006년 무학은 또 한 번 도약했다. 최 회장은 대기업에 한발 앞서 저도주 시장을 열어젖히기로 결정했다. 하이트진로 등이 저도주를 개발하고 있을 때 무학이 먼저 16도짜리 '좋은데이'를 시장에 내놓았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난 2016년 말 기준 무학은 부산 시장점유율 80%, 동남권 전체 90%, 전국 점유율 15~16%를 기록하고 있다. 저도주 시장에서는 전국 선두를 달리고 있다. 최 회장 취임 이후 이룬 성과다.

기업이 성장하는 만큼 지역사회공헌사업도 확대하고 있다. 자산 183억 원 규모의 '좋은데이나눔재단'은 지난 2011년부터 경남, 울산, 부산 교육청에서 중학생 25명을 추천받아 이들이 제 한 몫을 다하는 사회구성원이 될 때까지, 최장 10년간 매월 경제적 후원과 정서적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회성 보여주기식 도움이 아니라 인재를 키우겠다는 취지다.

많은 도움이 된 ROTC 경험

키 180cm, 몸무게 86kg 당당한 체구에 탤런트 뺨칠 만큼 미남형인 얼굴.

인터뷰가 이어지는 2시간 내내 그에게서는 외모만큼이나 호감을 갖게 만드는 대단한 열정과 자신감, 여유가 느껴졌다.

Q. 취미가 있나요?

"기업을 경영하면서 취미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규칙적으로 취미를 즐길 만큼 시간이 없어요. 기업과 결혼하느냐, 가정과 결혼하느냐는 기업인들이 항상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일정 규모를 넘어가면 그때부터 개인 생활이 힘들어져요. 스케줄을 제 맘대로 못 합니다. 일단 어떤 운동이든 적극적으로 하는 편입니다. 마라톤은 하프를 100번 넘게 뛰었습니다. 스쿠버다이빙도 했고요. 도전적인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아마도 스포츠카 빼놓고는 다해봤을 겁니다."

Q. 장교로 군 복무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복무했나요?

"13공수특전사에서 중위로 전역했습니다. 대학 때 ROTC를 했어요. 군 시절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솔직히 보람보다는 힘들다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전역하고 나니 오히려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얼마 전 군 인사 한 분을 만났는데 특전사 현역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현역 때 류해근 대대장님을 모셨는데, 그분 안부를 물었더니 육군 특전사령관을 지내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한테 혼나기도 하고 격려도 받았는데, 그 소식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특전사는 전체 대대원이 장교 사병 합쳐서 200명밖에 안 됐기 때문에 모두 각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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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총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최재호 회장.

Q. 대학에서 ROTC에 지원한 것은 본인의 뜻이었나요, 부모님의 뜻이었나요?

"그때는 다들 ROTC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장교로 가보고 싶었어요. 부모가 시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시험도 봐야 했고 체력도 강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선발 과정이 힘들었어요. 애니멀 트레이닝이라고 했는데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거 하면서 많이들 그만뒀어요. 합격하고도 그 과정을 이겨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에는 지방대 ROTC의 군기가 아주 강했습니다. 특히 ㄱ, ㄷ으로 시작하는 대학 ROTC의 군기가 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요. 경남대·경기대·단국대·동국대·국민대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교 ROTC 출신들이 전역하고 난 뒤에도 사회 적응을 잘했습니다."

Q. ROTC, 장교 경험이 지금 기업경영에도 도움이 되나요?

"그렇습니다. 힘들 때 잘 이겨냅니다. 자부심, 자긍심이 있어요. 저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을 하며 임하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포기하지 않고요. 그리고 장교는 어려울 때 앞장서고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솔선수범해야 하죠. 또 조직에 상명하복해야 하고요. 특전사는 적지 활동을 목표로 한 부대입니다. 그래서 적지에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생존해야 하는데요. 특전사는 훈련이 깁니다. 한 번 나가면 한 달씩 합니다. 그래서 계획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중요해요. 생과 사,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훈련할 때 불안할 때도 많았습니다.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두렵기도 했죠. 하지만 하다 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죽으면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뛰어드는 거죠. 그러니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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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공수특전여단 중위 복무 시절 고공강하 훈련 중이던 최재호 회장.

Q. 정치인 등 사회주도층이 자식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 하는 세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 돌아보면, 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때 방식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훈련이 무지막지했고 마구잡이였어요. 어쨌든 부모로서는 꼭 가라고 권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를 회피하라고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아이는 해군에서 복무하고 제대했습니다. 본인이 지원해서 진해에서 복무했어요. 이제 서른입니다. 88년 1월생인데 지금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실수, 변명 말고 책임지고 전진하고 함께하자

Q. TV 보시나요?

"뉴스만 봅니다. 드라마는 볼 시간이 없어 연결이 안 됩니다. 어쩌다 집에서 드라마 보다가 집사람한테 자꾸 물어보면 욕만 먹습니다. 구박받는 남편이에요. (웃음)"

Q. 회사 얘기 좀 해보죠. 올해 경영방침으로 5가지 행동방향을 정했다던데요.

"실수하지 말자, 변명하지 말자, 책임지자, 전진하자, 함께하자 5가지입니다.

우선 실수하지 말자는 것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나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기업과 고객의 기대치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수는 저만의 실수가 아닙니다. 고객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직원이 회사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 위반을 하면 그 개인뿐만 아니라 회사도 욕을 먹게 됩니다. "무학 직원이 신호위반을 하네?" 라고요. 실수가 없으려면 계획을 잘 세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변명하지 말자는 것은, 사회가 많이 변화하고 그만큼 변명거리도 많아진다는 건데요. 김영란법이 갑자기 생겨서 사업이 안 되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걸 변명거리로 삼으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부딪혀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책임지자는 것은, 기업이 커지면 지향점을 함께 공유하고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일을 윗사람이 결정하고 챙길 수는 없습니다. 조그만 것까지 윗사람만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일을 맡은 사람이 자신이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지고 일을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자는 겁니다.

전진하자는 것은, 우리 사회가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나빠지는 것도 많습니다. 일이 힘들어집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지 않나요? 우리 부모 세대는 6·25라는, 그 어려운 과정 겪고도 오늘과 같은 성과를 이뤘습니다. 과연 그때가 어려울까요, 지금이 어려울까요? 당연히 그때가 더 어렵고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진해야만 합니다. 최재호 개인도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2세 경영자로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멈추게 됩니다. 우리 직원들도 멈추게 되고요. 무학이 작을 때는 우리 직원 생각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지역을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학이 여기서 멈추면 지역을 퇴보시키고 한국을 퇴보시키는 겁니다. 최고경영자는 당면한 문제가 자신 개인의 문제냐, 모두의 문제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멈추는 순간 미래는 없어요. 우리 무학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우리 후세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영자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을 보여줘야 하고요.

함께하자는 것은 좋은 건 함께 나누고 힘든 것은 서로 격려하자는 겁니다. 경영자가 시키기만 해서는 안 돼요. 함께 일해야 합니다. 같이 움직여야 하고요. 구호만 외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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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호 ㈜무학 회장. / 박일호 기자

Q. 정기적으로 전체 임직원 외국 연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함께 여행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에 대한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어떤 점을 고치라고 백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실행이 잘되고 있는 곳 한번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우리 공장 굉장히 깨끗해요. 지금은 우리 직원들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 제일의 설탕공장, 간장 공장을 직접 견학하고 전 직원이 인식이 달라지게 됐어요. 실제 어떻게 하는지를 우리 직원들이 직접 하나하나 눈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외국 연수는 회장부터 신입 직원까지 동행합니다. 이런 행사를 자주 하는데요. 새해 시산제부터 연간 몇 차례 합니다. 저는 월급은 많이 못 줘도 우리 직원들 입는 것, 먹는 것, 놀러 가는 것은 절대 돈 아끼지 않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고 노는 것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Q. 정해놓은 경영목표가 있나요?

"2020년 목표입니다. 목표라기보다는 저의 꿈인데요. 저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될 때까지 합니다. 무학은 다른 지역에 진출하더라도 가능한 건물을 임대하지 않습니다. 아예 사거나 짓습니다. 우리 북서울지점, 남서울지점, 용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충주에도 공장을 짓습니다. 꼭 가야 할 길이라면 배수진을 치고 발을 뺄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하다가 눈치 보고 중간에 포기하면 안 돼요. 수도권에서 확실하게 시장점유율을 늘릴 겁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그걸 2020년까지 하겠다는 겁니다. 또 수출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공장을 지어서 확실한 기반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해서 2020년까지 매출을 지금보다 배로 늘리고자 합니다."

고객들에게 행복을 파는 기업을 목표로

Q. 주류사업 말고 다른 사업도 추진하나요?

"남이 안 하는 틈새시장에도 도전합니다. 지금 심각한 것이 TV만 켜면 대부업 광고인데요. 서민들이 그만큼 힘들다는 겁니다. 기업인들까지 거기 가서 어음 할인을 합니다. 앞으로 전자어음할인중개회사를 만들어서 그런 기업인들의 아픔을 해결해주고 싶습니다. 이달에 법인설립 마무리해서 7월부터 영업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이름은 한국어음중개회사입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어음 깡하면 수수료 재무처리도 안 되고 등재도 안 됐는데, 정식으로 제도권 안으로 넣어서 음지에 있는 것을 양지로 끌어내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이 지역에서 누구랑 경쟁하는 사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역에서 누구랑 경쟁하게 되면 저보다 없는 사람들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사업은 이 지역에서 경쟁하지 않고, 국가에 도움이 되고, 우리 직원들에게도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우리 무학의 목표는 고객들에게 행복을 파는 기업입니다. 해피바이러스를 파는 거죠. 단순히 소주를 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만 하고 있으면 예전 술도가 아들 아니냐는 평가밖에 못 받습니다. 외국에 나가서도 우리 주류가 세계 최고라는 인식 심어주고 거기서 이익도 취해야 해요. 글로벌 기업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 곳에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에요. 동남아시아가 우리하고는 가장 매칭이 잘됩니다. 현지 공장 설립을 구체적으로 작업 진행 중이지만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닙니다."

Q. 우리나라 기업경영환경 중에서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기업인을 존중하지 않아요. 그래서 2세, 3세들이 기업을 안 받으려고 합니다. 고생해서 성공하면 가는데 마다 나눠달라고만 하고, 또 열심히 해봤자 잘 못 하면 쇠고랑만 찬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독일식으로 주식을 물려줄 때 세금을 매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금은 주식을 팔 때 매기면 됩니다. 부의 대물림과 기업의 대물림을 구분해야 합니다. 1000개 기업 중에 수십 년, 백 년 뒤에 살아남는 기업은 한두 개뿐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식을 물려주는 것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과 다릅니다. 왜냐면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기업이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식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이죠. 기업인을 하찮게 봐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는 이병철·정주영 회장 같은 분들은 존경받았는데, 지금은 기업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기업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기업인은 부가 있지만 쓸 시간 없어요. 바쁘기만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기업인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인을 싫어합니다."

주류 '문화'를 파는 기업

Q. 무학에 대한 자부심, 애착이 남다를 텐데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여기서 나왔습니다. 마산 남성동 성모유치원, 월영초 1·2·3학년, 무학초에서 4·5·6학년을 다녔고요. 창신중 졸업하고 경상고 2회입니다. 대학은 경남대 경영학과를 나왔습니다. 지역에서 자라오면서 수없이 들은 말이 누구 아들이라는 얘기였어요. 좋은 면도 있고 힘든 면도 있습니다. 시장이 바뀌어도 '누구 아들'이라는 말은 변함이 없더라고요. 부모님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무학은 국민 누구한테 물어봐도 다 아는 기업입니다. 아버지가 일궈놓은 것을 자식놈이 다 말아먹었다는 소리 안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명예에 누가 안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을 하다 보면 쇠고랑을 찰 수도 있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습니다. 나 하나 쇠고랑 차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 잘못되면 직원들이 모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떻게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죠."

Q. 자도주 보호법 폐지 등 무학도 위기가 있었을 텐데요?

"죽을 고비가 와야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모양입니다. 제가 취임해서 회사를 많이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직원들이 따라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때는 자도주 보호법 아래 편했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때 당시 회사 안에서 제 별명이 쌩쌩돌이였어요. 가만히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자꾸 새로운 걸 시도하니까 직원들이 붙인 별명이에요. 외국에 수출해보려고 거래선도 하나도 없는데 비행기 타고 나가서 영업을 했습니다. 무작정 찾아갔었죠. 변화를 이끌려 했는데 제대로 안 됐습니다.

그러다 자도주 보호법이 갑자기 폐지된다고 하고,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니까 직원들이 그때서야 변화에 따라오더군요. 위기가 오히려 제 꿈을 펼치기에 좋았던 셈입니다. 그런 와중에 사건·사고도 많았습니다. 거래선과의 마찰도 많았습니다. 화이트를 출시하고 무학을 없애버렸습니다. 원제품을 없애버리니까 거래선은 불만이 많았죠. 저는 올인을 좋아합니다. 어차피 망할 거면 확실하게 망해보자고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일단 한다 하면 배수진을 칩니다. 꿈은 전력투구해야 해요. 찔끔하다 그만두면 안 됩니다. '지맘대로 한다'는 욕을 많이 들었지만 추진했습니다. 도수 낮추고 녹색병 도입하고 라벨도 양쪽, 목에도 붙였어요.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 망하는 것이 이상하다 할 정도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울산이 경남에서 분리돼 나가는 과정에서 경남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무학에 직격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의지를 갖고 토론하며 밀고 나가니까 직원들이 따라줬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학습을 하게 됐습니다. 울산이 되니까 직원들이 부산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부산에서도 처음에는 (시장점유율) 2%, 그다음에 5% 이렇게 넓혀나갔습니다. 지금은 70~80% 됩니다. 서울과 수도권도 그렇게 될 겁니다. 언젠가는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하나씩 제거해나가면 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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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호 ㈜무학 회장. / 박일호 기자

Q. 재미있는 뒷얘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1995년도에 23도 화이트가 나왔는데 '화이트'라는 이름은 그보다 훨씬 전에 나왔습니다. 1985년 무렵부터 있었어요. 수류탄 병 모양의 30도 소주였습니다. 그 술은 잘 안 팔렸습니다. 1992년 무렵까지 나오다 말았어요. 1995년 23도 일반 소주로 출시하면서 성공했습니다.

하이트맥주와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이트 맥주가 한창 잘나갈 때 하이트 창원공장 실무진에서 우리한테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유사 이름이 문제가 된다는 취지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름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잘 따져서 1병당 변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답 공문을 보내도록 해놓고 기다렸습니다. 당시 김명현 하이트 부회장과 제가 친했는데, 김 부회장이 하이트맥주를 출시할 때 나한테 '하이트'라는 이름을 써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었습니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하이트맥주 실무책임자가 서울에 있다가 마산에 내려와 보니 자기 회사 제품 이름과 유사한 소주가 있는 것을 보고 우리한테 그런 공문을 보냈던 겁니다. 결국 내부 보고를 받은 김 부회장이 그 실무책임자에게 빨리 무학에 가서 사과하고 오라고 하면서 없었던 일로 마무리됐습니다. 하이트맥주가 아마 1995년쯤에 나오고 그 뒤에 히트를 쳤을 겁니다. 우리가 그때 법원에 소송했으면 큰돈 벌 기회였는데 놓쳤어요. (웃음)"

Q. 무학 직원들이나 고객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 있나요?

"우리 직원들에게는 주류를 판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류문화를 판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는 그동안 노사문제가 한 번도 없었어요. 서로 신뢰를 갖고 일해왔습니다. 직원들과 자주 대화합니다. 직원마다 연간 2회 정도 저와 직접 대화할 기회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정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렇게 건의사항도 받고 개선점도 챙깁니다. 직원들 요구에 따라 유니폼도 바꾸고, 차량도 바꿉니다. 경영자는 직원들 얘기를 경청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경영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직원들도 제가 앞에서 제시한 5가지 원칙만 잘 실천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올해는 성공적인 한 해가 될 겁니다.

고객들께는, 우리 무학은 고객이 좋아하는 것을 하자는 것이 목표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고객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찾아서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질책하시더라도 애정어린 질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꼭 그 애정에 보답하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지역에서 돈 벌어서 서울에 쏟아붓는다는 오해도 있을 수 있는데, 서울 사업은 준비된 자금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번 돈은 지역에서 써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남에서 번 돈은 경남에 쓰고, 부산에서 번 돈은 부산에 쓰고, 울산에서 번 돈은 울산에서 쓰고 있습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목욕탕 갈 시간도 없는데요. 저는 그것을 제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의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부마항쟁에 앞장서다 체포되기도

Q. 개인적인 얘기 조금 더 여쭤보겠습니다. 부마항쟁 때 수배되고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인가요?

"언론에는 처음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제가 겪은 부마항쟁은 이렇습니다. 당시 시대적 환경이 유신헌법이 들어서고 독재와 탄압이 이어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갇히고 하면서 5·16 때보다 더 후퇴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국민들이나 학생들은 누구나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부산에서 먼저 촉발됐습니다.

당시 저는 경남대 경영학과 2학년이었는데요. 유네스코학생회, 불교학생회 같은 서클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약간 영향력 있었습니다. (정성기 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은 최재호 회장이 당시 경영학과 2학년 과대표였고 수배되어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다고 확인해주었다.) 도서관에서 중간고사 시험 준비 중인 시기였습니다. 한양수(부마민주항쟁 경남군법동지회 간사), 정성기 씨와 논의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터뜨리자는 데 뜻을 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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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호 ㈜무학 회장. / 박일호 기자

제가 경영학과 학생들을 모아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양수 씨와 성기 씨도 각자 자기 과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경영학과 학생 수가 가장 많았어요. 경영학과가 나서면 사학과와 가정학과가 자동으로 따라붙었습니다. 학교 안에 모였는데 아무 준비가 안 됐습니다. 겁도 났죠. 의견이 갈렸습니다. 시험 보고 나가자, 지금 나가자 같은. 제가 앞장서서 나갔습니다. 그렇게 다 나갔습니다.

정문에 경찰이 배치됐었어요. 그때만 해도 경남대는 후문이 없었습니다. 스크럼을 짜고 대치하다가 3·15의거탑에 모이기로 하고 옆 담을 넘어갔습니다. 경찰이 1개 중대만 배치되어 있어서 담 넘는 학생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중간 길에서 경찰에 막히기도 했는데 물방울이 흩어졌다가 모이듯이 했습니다. 우리가 길을 막았는데, 그때는 외길이었습니다. 시내버스가 못 다니고 교통이 마비됐습니다. 의거탑 앞에 모였는데 확성기도 없었어요. 토론도 안 됐습니다. 토론이 안 되니 '독재타도 유신철폐' 구호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맨 앞에 섰습니다. 사람이 얼마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끝이 안 보였습니다.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이 행렬을 지켜보고 박수치면서 동참해줬어요.

첫날은 그렇게 하고 해산했습니다. 다음날에도 계속했는데 계획성이 없다 보니 자연적으로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했습니다. 부마항쟁은 그렇게 우리 학생부터 시작됐지만, 따로 영웅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겁니다. 다만 우리가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그 후에 1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마산 어시장 청과조합 앞에 경남투자금융 자리에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마산경찰서에 잡혀가고 신문에 계엄령이 보도됐습니다. 친구들이 신문을 사서 집에 들고 왔어요. 그때 학생들이 볼 때, 부마항쟁 주동자는 최재호였습니다. 그런데 수배령에 적힌 건 '조직부장'으로 '남재호'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경찰에 붙잡힌 제 지인이 차마 제 이름을 그대로 불지 못하고 남재호라고 했던 겁니다.

당시 분위기로는 아버지께도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관계된 자식이 있으면 기업도 문 닫게 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신문에 크게 났었거든요. 아버지께서는 저보고 고성으로 도망가라 하셨어요.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니까, 지금 잡혀가면 몇 년 살지 모른다며 일단 도망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친구들과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망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버지께 자수하겠다고 하고 마산경찰서에 자수했습니다. 마산경찰서 앞에 마산역이 있었습니다. 역전다방으로 혼자 오라고 해서 갔는데, 가자마자 뒤로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여서 체포됐습니다. 꽤 고생했죠. 마산경찰서 수사과, 중앙정보부, 보안대 조사를 받았습니다. 서울시경에서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시경 조사도 받았습니다. 4~5군데 기관 조사를 받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제 받은 것 오늘 또 받고 했어요. 그때 경찰서 벽에 써 붙여놓은 걸 봤는데 맨 위에 '조직부장 최재호'라고 되어 있고 제 위로는 아무도 안 적혀 있더라고요. 누구의 명을 받아서 했느냐는 게 경찰 조사의 요지였습니다. 그때 수사과 벽에 큰 거울 있었는데, 그 거울을 젖히면 그 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지하실에 내려가면 큰 탁자 하나, 물 주전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팬티까지 모두 벗겨놓고 모욕을 주면서 조졌습니다."

Q. 왜 지금까지 이런 얘기를 안 했나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지금 이 지역에 살고 있어요. 부마항쟁 초기 단계에서 제가 역할을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항쟁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사람들과 저하고는 다릅니다. 지금의 부마민주항쟁은 그분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78학번들이 모두 다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서 물어보면 다 압니다. 한양수 씨도 증언대회도 나오고 보상 신청도 하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라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섰을 뿐입니다. 지성인은 자기가 알고 깨우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지성인입니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함께 꿈꾸고, 함께 노력할 것"

Q. 현재 거처는 어디인가요?

"창원 시티세븐에서 혼자 삽니다.(부인과 자녀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 전에는 서안양덕아파트 24평에서 14년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 아파트에 우리 사장님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저는 시티세븐 34평에 살고 있는데 불편한 건 없습니다. 가사도우미도 안 부르다가 나이 들면 냄새난다고 해서 1년 반 전부터 1주일에 한 번 옵니다. 저는 깔끔합니다. 저녁에 두부 요리도 해 먹습니다. 간단한 게 두부 잘라서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워서 간장에 찍어 먹으면 허기도 달래고 다이어트에도 좋습니다. 모자 눌러쓰고 마트에 내려가서 장도 봅니다."

Q. 왜 다른 재벌들처럼 큰 집에 살지 않습니까?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집이 크면 청소할 것도 많고 귀찮기만 합니다. 서안양덕 아파트 살 때 좋았습니다. 군에서 훈련받을 때 밖에서 텐트 치고 자면 바닥에 돌이 배겼는데도 잘 잤어요. 돌에 배긴 자리에 살이 움푹 들어갔다가 아침에 깨고 나서 30분쯤 지나야 움푹 들어간 살이 제자리로 돌아갈 정도였는데도 잘 잤습니다."

Q.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신가요?

"아들은 해군 제대하고 딸은 서울대 경영학과 석사과정 졸업했습니다. 둘 다 미국서 좋은 대학을 다녔고 지금 경영 수업하고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러길 바라지만, 선택은 자식들 본인의 몫입니다. 그건 제가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직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선 결혼부터 해서 아이 낳고 책임감이 좀 생겼을 때.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Q. 소문이 많습니다. 고졸이라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건가요?

"고졸이 대한민국 장교가 될 수는 없지 않나요? 고졸이 아니라는 게 자동으로 증명되는 거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대학원까지 다녔습니다."

Q.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일본 도카이대학에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유학 생활, 힘듭니다.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아요. 자기가 다 결정해야 합니다. 여권, 수강신청, 아파도 자기 혼자 해결해야 하고요. 녹록지 않은 생활입니다. 그리고 생활 자체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보다 앞서가려면 더 성실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저의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 공부 많이 했던 시절이 유학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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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호 ㈜무학 회장. / 박일호 기자

Q.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공동연구에서 거칠게 말하거나 욕을 섞어서 말하는 사람이 솔직한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가 말투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에요. 자신이 존중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중을 해줘야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제 말투가 오리지날 경상도입니다. 국민대에서 강의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말씨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창원대, 창신대 강의는 많이 해왔어요. 경상도니까요. 그 외 지역은 안 합니다. 경상도는 친하면 욕부터 하지 않습니까. 오해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반말 비슷한 경향도 많아요.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서로 인정해주고 저 사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아주시는데, 처음 대하는 분들은 오해를 많이 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기겁하기도 해요. 거침없는 말투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을 좀 하고 말하라고 주문받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은 정치적인 문제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좌성향, 우성향 모두 발언을 세게 합니다. 그랬더니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 이들도 있는데요.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일 뿐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Q. 롤모델로 삼는 분이 있나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 뚝심과 불굴의 정신은 본받아야 합니다. 부럽기도 해요. 그분은 1세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각오로 일에 임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합니다. 2세는 부모에게 받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늘 있습니다. 옷을 하나 사 입어도 부모님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중에 저는 유일하게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의 고뇌하는 모습을 늘 보면서 자랐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다들 안 된다고 할 때 미래를 보는 전략이 대단하지 않나요? 저렇게 병석에 누워계시니 안타깝습니다.

좋아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입니다. 저는 남들과 다른 이유로 그분을 좋아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이긴 것도 중요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은 하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 놓고 나선다'는 그 정신을 좋아합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품을 보면서 저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무학이 서울에 진출하는 것도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저는 준비를 다 하고 나서는 겁니다. 6년 동안이나 준비해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달착륙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성공시켰고요. 함께 꿈꾸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무학 가족들도 함께 꿈꾸고 함께 노력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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