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을 회화로 표현하는 미술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캔버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긴장감이 돌았다. 몸을 숙여 듬뿍 풀어놓은 색색의 아크릴물감에 붓을 가져다 대나 싶더니, 호흡을 멈추고 붓과 몸을 하나로 움직였다. 일순간 캔버스에 흔적이 남았다. 붓이 옮겨간 결, 그리고 순간적으로 튕긴 물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최행숙(59) 작가의 작업 모습이다. 작가의 일순간의 행위가 작업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짧은 시간 작가의 감각과 우연이 만들어내는 작품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저 '휘리릭' 붓을 긋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 고도의 집중을 통해 붓이 제 결을 캔버스에 자연스레 맡기게 한다. 일필휘지. 한 번의 움직임이 정적인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모든 작업이 마찬가지이듯, 한순간에 절정에 이르는 법은 없다. 붓을 한 터치 옮겨 놓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시간에 캔버스에 풀어놓은 작업이 모두 작품이 되지도 않는다. 온전히 작가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한 작품은 그 자리에서 폐기된다. 짧은 시간의 빠른 판단으로 캔버스에 사용한 물감을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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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행숙 작가. / 김구연 기자

대형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두고 큰 붓 3개를 붙여서 자체 제작한 붓을 들고 작가는 작품 완성을 위해 온종일 노동을 한다. 붓과 몸이 하나가 돼야 하는 작업이기에 더 많은 노동이 든다. 최행숙 작가를 만나고자 찾은 창원 사파동의 지하 작업실에서 작가는 팔에 기다란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종일 커다란 붓을 붙들고 작업을 하다 보면 온몸이 쑤십니다. 특히 팔이 많이 아픈데요. 병원에 가면 작업을 그만두라고 권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웃음)"

작가의 창작 활동은 작업실이 말해주고 있다. 작업실 한쪽에는 완성한 작품이 빼곡히 쌓여 있고, 작업을 하는 공간에는 바닥, 의자, 가구 등 곳곳에 물감이 튄 흔적이 있다.

몸을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는 '액션 페인팅'은 실제로 힘이 많이 들기에 여성 작가보다는 남성 작가들이 많은 편이다. 각종 행사에서 퍼포먼스로 작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 작가는 퍼포먼스 요청이 많았지만, 마음과 몸을 다잡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아직 응한 적은 없다고 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작업이기에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100호는 기본이고, 200호, 300호의 대형 작업은 온몸을 움직여서 그리다 보니 쓰러지는 일도 다반사다. 작가 스스로 '행복하게, 아름답게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힘든 그림'이라고 말할 정도다.

최행숙 작가는 지난 2014년부터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해오고 있다. 선명한 오방색을 캔버스에 칠해놓고 있다. 오랫동안 '활력(Vitality)'을 주제로 모노크롬(단색화) 작업을 하던 작가는 3년 전 국악 밀양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다 아리랑 작품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아크릴이라는 서양 물성에 한국의 전통색상인 오방색을 결합해 현대회화와 전통을 동시에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전 작품인 검정 등을 이용한 모노크롬 작업을 한 지 6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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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행숙 작가. / 김구연 기자

"작품 속 아리랑은 한반도의 수많은 침탈과 일제 강점기 겨레가 토해냈던 한의 소리가 아닙니다. 겨레 스스로 한을 떨쳐 일어나는 깨달음의 희열과 신명의 춤사위를 큰 붓의 일필로 그으며 강렬함을 더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작품 '아리랑'을 저작권 등록도 했다.

"아리랑을 소재로 한 일반적인 시각 디자인이나 음악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회화에 아리랑을 접목한 시도와 과정, 그 결과는 없습니다. 그래서 2015년 11월 아리랑 작품을 저작권 등록까지 했습니다."

작가는 창작의 성실함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길도 모색했다. 공연 속에 자신의 작품 아리랑을 접목하는 방법도 찾았다. 아리랑 공연 무대에 자신의 아리랑 작품이 함께 하면 공연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도는 성과를 냈다. 올해 6월 울산에서 공연 무대 배경에 자신의 작품 아리랑을 사용했다. 갤러리 '아리오소' 개관 5주년 기념 콘서트 아리랑에서 국악,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 무대에 작가의 대형 작품을 선보였다. 미술과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게 공연은 준비됐다. 대형 크기의 작품은 공연 무대에서 대형 빔프로젝터로 무대마다 작품을 달리하며 연주와 어우러졌다. 물감이 요동치는 듯한 생동감 있는 작품은 연주와 함께 흐르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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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작업을 하는 최행숙 작가. / 김구연 기자

공연무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컬래버레이션도 추진됐다. 조만간 출시될 한 음료 회사의 병 라벨에 자신의 작품을 결합한 것이다. 전통주, 건강기능 음료 등을 만드는 '우포의아침㈜'과 독일 바이에른주 상공협회 아시아 최초 독일 티 소믈리에가 운영하는 카페 '티엘츠'가 함께 만든 '루이보스&오렌지 티' 병에 작가의 작품을 프린트해서 부착하게 됐다. 티엘츠 측에서 연락이 와서 함께 하게 됐다고 했다. 올해 1월 '단색화의 거장' 이우환 화백이 국제적 명성을 지닌 1등급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2013년산 라벨을 컬래버레이션해서 선보인 작품도 봐 온 터였다. 차 음료와 최 작가의 작품은 절묘하게 어울렸다.

KBS 노래자랑 무대 배경에도 최 작가의 작품을 활용한 그림이 오르기도 했다.

"제 그림은 장사익 가수의 노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창도 아니고 클래식도 아닌 독특함이 있어요. 제 그림은 어찌 보면 문인화 같지만, 서양화의 물성을 이용한 정신적인 그림입니다."

최 작가는 대중에게 알려진 모노크롬, 아리랑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지금까지 해온 작가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구상, 비구상, 평면, 설치 작품을 소품, 콜라주 형태 등으로 두루 보여준다. 작업실 입구에 의자에 앉아 있는 곱슬머리 사람 작품은 인상적이다. 구리와 철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작가는 "부지런히 많이 움직이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면, 좋은 그림을 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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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행숙 작가. / 김구연 기자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고성 출신인 작가는 여고시절 미술교사도 없는 시골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던 작가는 대학 미술 사생대회에 입상하면서 부산의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됐다고 했다. 대학에서 유화 그림을 처음 그렸다고 한다. 유화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기름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몰라 주유소를 찾아가는 해프닝도 있었을 정도다.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미술학원을 열었다. 아이를 키운 후 차츰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치열한 작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어느덧 그런 세월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올해 최 작가는 전시가 유독 많다. 개인전이 경남을 비롯해 서울 등에서 6회나 계획됐다. 전시는 대부분 마무리됐다. 현재 서울 크라운해태 1층 쿠오리아갤러리에서 '회화 아리랑(Vitality of Arirang)' 전시를 열고 있다.

작가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겠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기획이 안 됩니다. 내년에는 내년의 색이 있을 거에요.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정진해야죠.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걸음을 멈추고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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