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피 속이지 못해 '이중생활'

이임춘(52·경위)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의 프로필은 독특하다. 주요경력에 '경찰문화 대전 대상 입상', '터키 이스탄불 IAC갤러리 전속작가', '미국 캘리포니아 알렉산더 갤러리 전속작가'와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그렇다. 그는 경찰관이자 미술작가다. 일상에서는 거제 어촌마을 치안을 책임진다. 그러다 경찰 제복을 벗는 순간 미술작가로 변신한다. 그의 수상한 이중생활(?)을 들여다봤다.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는 남부면 다대리 어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근무자는 이임춘 센터장 혼자다. 차로 10~15분 거리에 있는 '바람의 언덕', '해금강', 명사해수욕장 같은 유명 관광지가 그의 관할 구역이다. 피서지가 많다 보니 여름철 가장 바쁠 수밖에 없다. 9시 출근해 이곳저곳 순찰하고, 신고 현장에 나가면 '나 홀로 근무' 외로움을 느낄 새 없이 하루가 지난다. 그가 퇴근하는 야간, 그리고 주말에는 남부치안센터가 속해 있는 동부파출소에서 맡는 식이다.

"올해 봄이었어요. 충북 청주 사는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바람의 언덕' 관광차 왔다가 집에 돌아갔는데 150만 원이 든 지갑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할머니 생각에 '바람의 언덕' 아래 있는 도장포유람선터미널에서 흘린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터미널에 가보니 다행히 여직원이 발견해서 보관하고 있더군요. 택배로 부쳐드렸더니 다시 전화가 왔어요. '손자 등록금 보탤 돈이었는데 찾아서 너무 다행이다'며 울면서 고마워하더군요."

지금의 남부치안센터로 오게 된 건 2014년 6월이다. 좋지 않았던 건강과도 연관해 있다.

"평소 혈압·당뇨도 없었는데 3년 전 뇌출혈이 찾아왔어요. 겨울에 냉수로 머리를 감는데 이상하더라고요. 머리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119에 전화해 병원으로 옮겨졌죠. 머리를 열어 16시간 동안 수술했습니다. 그 뒤 6개월 정도 휴직했다가 건강도 찾을 겸 해서 여기 바닷가로 오게 됐죠. 지금은 무리한 운동은 못 하고 계속 조심하고 있죠."

이임춘.jpg
▲ 이임춘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

그는 고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줄곧 고향에서 지냈다. 할아버지·아버지는 전통 대바구니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대나무쟁이'라고 부르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한다. '쟁이'라는 말에 담긴 폄훼의 시선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대나무를 놀이 기구 삼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7살 때 아버지와 함께 대나무밭에 갔습니다. 맑은 하늘에 비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속에서 대나무 잎이 휘날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 느낌을 그림으로 옮겨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더랬죠."

이렇듯 예술에 대한 꿈틀거림은 온몸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대한 인식도 무감각해졌다. 별을 단 군인이 멋있어 보여 그러한 꿈을 품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철학·사상에 마음을 두기도 했다. 토목 쪽으로 공부하면 돈벌이가 수월하다는 형들 말에 경상대 토목학과에 들어갔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대신 중국어를 부전공으로 신청했다. 대만으로 유학을 떠나 2년 정도 동양사상을 공부했다. 이때 중국어 관광통역원·관광종사원 자격증을 땄다. 대학 졸업 후 관련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평생직장을 찾다 눈에 들어온 경찰 순경 공채에 응시, 30살 나이에 합격했다.

새 영역 개척한 미술작가

이임춘 치안센터장은 30대 중반에 끓어오르는 예술 DNA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삶이 좀 지쳐가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어릴 때 앉았다 하면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다시 해보자는 생각에 무턱대고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 그랬더니 어릴 때 그 시골길을 걷는 듯한 편안함이 온몸에 밀려들었습니다. '이게 정말 내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동안 취미로 계속 그림을 이어갔다.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을 듣다 보니 욕심이 났다. 거제 집에 아예 작업실을 마련하고 전문 작가로 나섰다. 특히 대나무공예를 현대미술로 승화한 '테어링 아트(Tearing Art)'라는 새 장르를 개척해 나갔다.

"캔버스 천 위에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다시 찢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 대바구니 엮는 기법을 현대미술로 승화한 것이죠. 제가 이름 지은 '테어링 아트'에는 세 가지 기본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과거·현재·미래가 살아 숨 쉽니다. 한지를 바르는 게 과거, 캔버스 뒷면에 색칠하는 것이 현재, 캠퍼스 앞면에 다시 색을 입히는 것이 미래입니다. 두 번째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가 일구어 놓은 대바구니 기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파괴와 창조입니다. 캔버스 천을 찢는 파괴를 하지 않으면 창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미술.jpg
▲ 작업 중인 이임춘 경위. / 이임춘 경위

누구로부터도 미술을 배우지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 스스로 길을 마련해 나갔다. 보수적인 이쪽 세계에서 미대 출신이 아니라는 현실적 벽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SNS를 활용해 대중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국외에서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11년 터기 이스탄불, 2012년 미국에서 초대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샌디에이고 국제공항에 장기간 전시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본 한국인이 그를 만나러 창원에 찾아오기도 했다. 현재 페이스북 친구 5000명 가운데 4000명이 외국인이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배우 제라드 드빠르디유(프랑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사람은 세계적인 미술 수집가이기도 해요. 우연히 아트딜러를 통해 제 작품 도록을 본 거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경찰관이라고 하니까 더더욱 놀랐나 봐요. 그물망처럼 복잡한 삶의 고뇌를 표현한 작품 '인생'을 매입하겠다는 뜻을 전해왔죠. 지난 7월 고가의 대금을 부쳐왔더군요. 제가 알고 보면 숨은 애국자입니다. 하하하."

이임춘 치안센터장, 아니 이임춘 작가는 이제 미술계에서 이러한 평을 받는다.

'전혀 생소한 형식을 담보로 하나의 사물이거나 혹은 어떤 이미지의 완결을 넘어 개인적 시스템으로 구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예술 소통방식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경찰관으로 접한 인간 내면, 작품으로 승화

이임춘 치안센터장은 경찰관이 된 이후 통영에서 잠시 있었던 것 말고는 줄곧 거제에서 근무하고 있다. 첫 발령 때 스스로 거제를 원했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거제'가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난 것과도 관련 있다.

"대학 때 거제학동몽돌해수욕장으로 엠티를 갔는데 너무 멋진 겁니다.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나중에 선을 봤는데 거제학동몽돌에 사는 여자였어요. 아내와는 그렇게 연을 맺었습니다."

아내는 지금 작가 이임춘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열성 팬이다. 딸 둘은 각각 음악·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경찰관과 미술작가,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온 지도 벌써 15년이다. 경찰 경험이 작품활동에서 큰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 거제 장승포에 순찰 나갔을 때입니다. 봄날이었는데 저쪽에서 망아지 같은 물체가 웅크려 꽃을 먹고 있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 옷을 모두 벗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니 '바람난 남편한테 쫓겨났는데 배가 너무 고파 꽃을 먹었다'는 겁니다. 이 분을 요양시설로 안내했는데, 몇 년 후 결국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억이 저에게는 너무 충격적으로 남아 '꽃을 먹는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에 담았습니다. 경찰 생활하면서 접한 여러 인간 군상을 작품에 많이 녹이게 됩니다."

물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의지의 문제로 그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피플파워.jpg
▲ 이임춘 거제경찰서 남부치안센터장.

"작품활동을 할 때 시간을 아끼려고 밑그림 없이 머릿속 구상을 바로 옮깁니다. 늘 시간과의 전쟁입니다만, 결국엔 어떻게 활용하느냐로 귀결됩니다. 동료 경찰관들에게도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지 말고 어떠한 것이라도 배우라고 늘 강조합니다."

그는 이미 경찰 조직 내에서도 유명인사다. 미술에 관심 많은 경찰 고위 간부들은 그의 작업실을 종종 찾는다.

20년 넘은 공직생활도 이제 9년밖에 남지 않았다. 퇴직 이후 보낼 시간은 명확하다.

"지금도 경찰 제복을 벗고 작업실에 앉으면 한 시간가량 멍하게 있습니다. 정형화된 경찰에서 자유로운 미술로 옮겨가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터키 갔을 때 자유롭게 노래 부르는 집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군요. 퇴직 후에는 저 역시 지금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돌아가 오로지 작품활동에만 전념하려 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