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 보고 살아온 60년…"영화 출연할 때면 묘한 감정 느껴"

마산종합운동장이 NC다이노스 신규야구장 리모델링(창원마산야구장)에 착수하면서 마산문화원도 정들었던 종합운동장을 떠났다. 이에 마산문화원 한 켠에 지난 2007년 10월 자리를 잡았던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도 정들었던 터에서 떠나게 됐다. 

이승기(78)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은 약 60년간 모아왔던 영화 포스터, 잡지, 이론서, 비디오, DVD, 팸플릿 등 약 1만 5000여 점을 마산종합운동장 내 창고에 보관 중이다. 영화자료관 터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탓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지난 60년간 영화 관련물을 수집한 영화광 이승기 관장을 만나 영상매체와 첫 인연, 그리고 현재와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잊지 못 할 영화와 첫 인연

이승기 관장은 통영군 통영읍 명정동이 고향이다. 일제시대 선친이 서기로 일한 금융조합(현 농협) 뒤편에는 지금은 흔적이 사라진 통영 유일의 극장 봉래극장이 있었다.

6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봉래극장에서 태평양전쟁 뉴스와 사무라이 영화를 보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통영 충렬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낙동강', '마음의 고향', '아리랑'과 같은 영화를 단체관람하며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영화의 매력에 흠뻑 젖은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 했다. 그 시기 어린 이승기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일명 '개구멍 뚫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오래된 일본식 건물인 봉래극장에는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었거든요. 극장에서는 나무판자로 개구멍을 막아뒀지만 힘이 쎈 아이들이 저녁에 나무판자를 떼어내고 극장으로 들어가서 영화를 보곤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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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 박일호 기자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미국 영화 <화성초특급>에 대한 일화를 얘기했다.

"그날도 영화를 보러 어김없이 개구멍 뚫기를 통해 극장에 들어갔는데 표를 사서 입장한 관객보다 몰래 훔쳐보는 아이들이 많았고 사실을 알게 된 극장 관계자들이 공짜 손님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덩치 큰 형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자 붙잡혀서 극장 간판실에 끌려갔어요. 그땐 몰래 영화를 보다가 잡히면 모욕감을 주려고 간판을 그리는 물감으로 아이 얼굴에 칠하곤 했죠. 막 얼굴에 칠하려던 찰나에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 입장하는 사이 몰래 도망쳤어요."

한 차례 혼이 난 뒤부터 이승기 관장은 '개구멍 뚫기'를 끊었다. 대신 극장 청소하는 일을 도와주거나 통영시 내에 걸어 놓았던 영화 간판을 극장에 가져다주고 공짜로 영화를 봤다.

1953년. 통영에서의 유년시절은 마산으로 오게 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마산서중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하고 창신중에 다녔다. 그러나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4교시가 끝나면 곧장 도시락을 까먹고 오후에는 국제시장으로 달려가 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관련 자료 수집을 시작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그때 미국 영화 푸른화원(원제 작은 아씨들)을 감명 깊게 보고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어요. 준 앨리슨(June Allyson)이라는 여배우였는데 매우 단아하고 꿈꾸던 이상형에 느낌도 좋더라고요.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이던 그에게 영화잡지를 통해 알아낸 주소로 팬레터까지 보냈었죠."

팬레터도 특별했다. 흰 종이에 글을 써봐야 읽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노란 물감으로 흰 종이를 염색했다. 노란색 종이를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린 뒤 친구 학교 담임선생에게 번역을 부탁하는 정성을 들였다. 팬레터의 내용은 의외로 심플했다. "당신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사인한 브로마이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명의 스타를 좋아하게 된 학생치곤 상당히 건전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답장을 받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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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 박일호 기자

영화 관련 수집도 이맘때부터다.

마산에 있는 극장에서는 창동 거리에 있는 일제시대 집 유리창에 영화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가 영화가 종영되면 회수를 했다. 유리가 깨져 있는 집을 눈여겨봤다 야간통행금지가 끝나거나 끝날 무렵 몰래 포스터를 떼 왔다. 가까스로 몇 장을 모왔는데 어머니 가게에서 팔던 밀가루를 담는 봉투로 사용해 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이 외에도 수집한 것은 많다. 당시 영화 포스터를 줄여 뒷면에 해설을 붙인 영화 프로그램을 수집했다. 극장에서 한 장에 10환을 받고 팔았는데 한 장 한 장 사모아 약300장가량 모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물건이라 이제는 희귀한 자료가 된 셈.

영화 관련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를 보는 데도 부지런했다. 학칙이 엄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진학한 뒤에는 영화를 통해 얻은 연기력으로 조퇴를 하면서까지 극장에 얼굴 도장을 찍었다.

고교 3학년 시절이던 1959년. 태풍 사라호가 한국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준 다음 날, 시민극장에서 미국 영화 <뇌격명령>을 보러 갔다가 규율부 선생에게 걸렸다. 그러나 당돌한 10대 이승기는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영화를 계속해서 보러 다녔다. 끝내 15일간 유기정학을 받았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장사가 망하면서 끝내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산이나 부기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영화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꿈이 좌절되면서 힘이 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기 관장이 웃으며 말했지만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사라진 당시,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미뤄 짐작조차 어려웠다.

하루 4편, 1년 최대 210편 영화 관람

졸업하고 군을 제대한 뒤 마산 오동동(창원 마산합포구)에 있는 술집 경기 담당 지배인으로 일했다. 약간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생각하고 맥주 가게를 개업했지만 2년 만에 망했다.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는 그는 1968년부터 18년간 한국연예협회 경상남도지부 사무국장을 했다.

당시 마산은 유흥업소가 대단했다. 연예인이 많을 때는 200명 가량 활동했는데 회비와 자격시험 응시료 수입으로 연예협회 살림살이가 윤택한 편이었다.

사무국장을 그만둔 뒤에는 생업은 주례로 했고 그 외 시간은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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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 박일호 기자

마산 합성동 아카데미, 양덕동 한일극장, 석전동 은하극장, 부산 범일동 보림극장, 삼일극장, 삼성극장 등은 2본 동시상영을 하기도 했다.

이승기 관장은 아침 식사를 한 뒤에는 극장에 가 영화 두 편을 본 뒤 국수를 사 먹고 또 두 편을 관람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할 때면 일찍 버스를 타고 가 영화 네 편을 보고 시장에서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먹고 밤늦게 귀가하기도 했다.

2본 동시상영 영화는 보통 6개월 전에 개봉된 작품이 많았는데 한 편을 10번 넘게 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상영일, 극장, 제작자, 주연, 감상 소감을 기록한 영화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정리해보니 한 해 210편을 본 적도 있었어요."

영화라는 우물만 판 결실을 맺다

영화 관련물 수집에는 방도가 없었다. 그저 발품을 팔 뿐이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영화 서적을 사고 비디오 가게를 전전하며 비디오와 DVD를 구했다. 미국에도 세 차례나 방문해 원서, 원음 비디오, 영화 포스터 복사본 등을 사 왔다.

노력의 결과는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 개관으로 이어졌다. 2007년 10월 개관해 최근 문을 닫기 전까지 1만 5000여 점의 영화수집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나 책 출간, 배우 출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해왔다.

이 중 이승기 관장에게 <마산영화 100년> 출간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1907년에 문을 연 마산 최초의 극장 '환서좌'와 마산 최초의 극영화 '청춘의 설움'의 소개로 시작해 100년의 시간을 훑어가며 마산극장, 영화에 얽힌 이야기, 마산출신 영화인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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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 박일호 기자

학자가 아니고 인터넷이 서툴러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주위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배우로 나설 때는 묘한 감정이 뒤섞이기도 했다. 어릴 때 꿈꿨던 감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적은 개런티에도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마산의 극장 역사를 찾아서>를 통해 '제3회 서울 노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에 출연할 때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내가 꿈꿔왔던 현실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소중한 순간이었죠. 몸은 피곤해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자체에서 영화자료박물관을 열었으면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은 아직 재개관 여부가 불투명하다. 때문에 이승기 관장이 평생을 모아온 자료의 사용 여부 역시 명확하지 않다.

그는 문화예술이라는 부분에서 영화만큼 파급력이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영화가 지닌 상품성, 관광가치를 높이 산다. 한 영화가 1000만 관객이라는 흥행가도를 달리는 데 대해 '영화만이 가진 특수성'이라고 한다.

영화만이 지닌 파급력. 그 영향력을 이젠 지자체에서 관광상품화하길 희망한다.

"내일모레면 내 나이가 여든입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내가 모아온 자료를 지자체에서 박물관 형식으로 사용하면 좋겠어요. 모아온 정성이 있으니 무상으로 줄 순 없어요. 특색별로 포스터 전시를 하면 10년, 20년도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상품이 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된다면 내가 살아온 길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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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 박일호 기자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이승기 관장은 창원시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들었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승기 관장에게 있어 영화를 빼고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었다.

잠시 고민을 마친 뒤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영화에 미쳐서 가족들을 제대로 못 돌본 게 미안해서 해외여행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딸이 미국에 살아서 간 적 있는데 그때도 헐리우드 가고 영화, 영화 하다가 관광을 제대로 못 했지요. 가족끼리 (해외여행) 한번 가보면 미안함도 가실 것 같고 좋은 추억이 안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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