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건 예술학교, 노인병원 설립"

★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

최근 경남에 '핫'한 인물로 떠오른 경제인이 있다. 시선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인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야나세 우영준 회장 이야기다.

그는 2014년 11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 도내 40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등록됐다. 지난 4월 29일에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금강미술관을 개관해 경남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도내 기업에서 미술관을 설립 운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여파는 도내 경제계와 문화계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관 개관은 그가 실천해왔고 또 계획하는 나눔 사업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 그를 삼고초려 해서 만났다.

그림을 잘 그렸던 모범생

우영준 회장은 1957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서 1남 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진동 앞바다에서 어장을 하시면서 어린 시절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회상했다.

"어장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에 내세울 부자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 끼니 걱정 안 하면 좋은 환경이었죠. 집안일도 조금씩 도와주고 그냥 시키는 대로 공부하면서 말 잘 듣던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림은 좀 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으니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허허."

티 없이 자랐다지만 8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그에게도 작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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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국야나세 우영준 회장./박일호 기자

"아버지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답니다. 제대하고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건강악화로 돌아가셨어요. 당시에는 충격이었죠. 그런데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 고모들과 함께 살아서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서 나오는 외로움이나 허전함은 모르고 자랐어요. 아버지 형제, 자매가 10명이라 북적거렸죠. 그러니 뭐 그런 어려움은 없었고…."

대신 세월이 흘러 철 들면서 되돌아보니 어머니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돼 뒤늦게 가슴 아픈 때가 많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진동에서 농사지으면서 지내십니다. 농사 그만두라고 해도 안 됩니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농사 잘 지어요. 선수예요, 선수. 배추, 고추농사 지으신 것 우리 회사 식당에 납품합니다. 제 거래처죠. 그런데 저는 어머니 아픔을 어렸을 때는 몰랐고, 나이 들면서 어렴풋이 짐작을 하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더 미안하죠. 말 그대로 청상과부로 시할머니, 시부모에, 시동생에, 자식까지 포함해서 10명이 넘는 대가족 살림을 사셨으니…. 일일이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미안하고 또 지금 건강하게 곁에 있어줘서 고맙죠. 잘 해드려야죠."

그는 진동초등학교를 거쳐 진동중학교에 다니다 함안 함성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부산 경남공업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은 서울시립대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미대 가려고 그쪽으로 공부를 좀 했어요. 그런데 얼마 못하고 접었습니다. 할아버지 나이가 드시면서 수입이 줄고 그러면서 경제적으로 미대를 갈 만큼 그런 형편이 안됐어요. 하는 수 없이 그만뒀죠. 대신 공고에서 전공이 배 설계였어요. 그림에 관심과 자질이 조금 있다 보니 잘했어요. 하고 싶은 미술은 못 했지만 그나마 조금 유사한 설계를 하면서 그 꿈을 삭였고 그게 지금의 밥그릇으로 이어지는 인연이 됐죠. 대학에서 경영학을 했는데 사실 그렇게 적성에는 안 맞았던 것 같고요. 졸업 후에도 미술을 하고 싶어서 방황을 많이 하게 되죠."

미술에 대한 동경과 방황

대학을 졸업 하고 군대를 제대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할아버지 어장 일을 맡아서 운영하게 된다.

"군대는 '부(夫)사망 독자'라는 조건 때문에 6개월 단기복무하고 제대했습니다. 이후 고향에 남아서 한 2년 남짓 할아버지 어장을 직접 운영했어요. 미더덕 양식도 하고 했는데 돈은 됐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촌에서 이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요. 갈등에 시달렸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죠. 그러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박차고 서울로 갔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죽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림을 다시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힘들어도 열심히 하면 입에 풀칠은 안 하겠느냐는 자신감도 있었고…. 그림 그리다 죽으면 그림이라도 남지 않겠느냐는 설익은 꿈으로 무작정 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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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국야나세 우영준 회장./박일호 기자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서울 생활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실감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사로 그림도 배우고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자신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입에 풀칠이 안 되니 어쩌겠어요. 나중에는 5명이 미술학원을 차려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것도 맘먹은 대로 안 됐고요. 3년 만에 포기했습니다. 자립해서 할아버지, 어머니 부양해야 할 나이에 계속 손을 벌릴 수도 없었고요."

그때 손을 내민 분이 일본에 계시던 작은아버지였다. 장손이 걱정된 숙부는 일본에 와서 조선회사에 취직해 일을 배우라고 권유했고 그때 입사한 회사가 '일본야나세'였다.

"1985년이니까 29살 때일 겁니다. 고등학교 때 조선 설계를 조금 배웠던 덕에 조선회사에 취직해서 설계도 배우고, 현장에서 용접 등 조립 작업도 배우면서 일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밤에는 퇴근해서 일본어 공부하면서 미친 듯이 열심히 했어요. 그런 모습에서 신뢰를 얻었던 것 같아요. 3년 만에 공장장까지 승진하게 됐습니다. 이례적이죠."

그러던 중에 숙명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일본야나세는 태국 진출을 추진하다 여러 여건이 맞지 않아 철수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우 회장이 나서서 한국 진출을 제안해 성사되면서 지금의 한국야나세 설립 기초가 된다.

"일본 조선업이 최고의 호황기를 누릴 때였어요. 태국에서 철수하는 순간 한국으로 돌리면 되겠다는 생각에 제안했는데 덜컥 CEO가 승낙하더라고요. 그때가 1988년입니다. 그 뒤로 1990년까지 한 2년 한국, 일본을 오가면서 국내 조선시장 조사를 비롯해 착착 준비해서 공장 설립을 진행했습니다."

시련을 넘고 넘어 성공을 향해

㈜한국야나세는 1991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율티리에 설립된다. 지금은 일본야나세 지분이 10%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일본 CEO 80%, 우 회장 20%로 설립됐다.

"그때 35살이었을 거예요. 초창기에는 직원들과 같이 작업을 했습니다. 제 손에 보이는 이 많은 점은 그때 상처입니다. 검버섯이 아니고요. 허허. 용접 불똥이 튀어서 입은 화상입니다. 아침 6시께 나가서 밤 10시까지 직접 용접하고 쇠 깎고 그랬죠. 돌아와서는 무역 서류를 꾸미고…. 그때 무역서류 작성 전문기관에 맡기면 건당 20만 원씩 한 달에 200∼300만 원 정도 됩니다. 직원 10명 월급은 더 되는데 그러니 직접 챙겼죠. 하루에 4시간 정도 자고 일했어요. 말도 못합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상상을 못 하실 겁니다. 진짜 죽을 둥 살 둥 코피 터지게 했어요. 일하느라고 결혼도 38살에 했습니다. 그러면서 품질을 인정받고 물량도 늘고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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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국야나세 우영준 회장./박일호 기자

업계에서 조금씩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 우 회장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대우조선해양에서 대규모 건조시설만 갖추면 물량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1993년일 겁니다. 모두 45억 정도 필요했어요. 굉장히 좋은 제안인데 제게는 그런 돈은 없고, 말 그대로 '땡빚'을 내서 해야 하는데 빌릴 데가 없죠. 빌린다고 해도 제대로 갚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그런데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하고…. 방법을 고민하고자 잠도 제대로 못 잤고, 해법을 찾으러 사방팔방 쫓아다녔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렵게 아는 인맥 동원해서 산업은행을 찾아갔죠. 창원지점장에게 브리핑을 했는데 그분이 공장 찾아와서 살펴보고는 서울 본점에 가서 승인을 받아왔어요.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요. 공장 건설업체 사람 2명이 신축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대우조선해양이 산재사망 여파를 우려해 중간에 사업이 중단될 뻔했습니다. 제가 직접 유족들 만나서 사과드리고 최대한 보상해 드리면서 증설이 겨우 마무리됐죠. 안타깝고 힘들었던 이야기죠."

하지만 그것 또한 시련의 끝은 아니었다. 공장 증설이 마무리돼 성장 가도를 달리는 중에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와 ㈜한국야나세는 좌초 위기를 맞게 된다.

"회사 물량이 꾸준히 늘어나는 시기였어요. 증설하면서 빌린 돈에다 이후에도 국제 거래를 위해 은행에서 달러를 빌려서 사용했는데, IMF가 오면서 달러 가치가 거의 두 배로 폭등하게 됐죠. 열심히 벌어도 남는 게 없는 상황이 되고 따른 업체들도 어렵다 보니 수금은 안 되고…. 정말 난감했어요. 이때도 은행에 사정하고 해서 겨우 1년 유예해주면서 한숨 돌렸죠.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시기였습니다. 그걸 견디고 나니 다시 기회가 찾아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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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국야나세 우영준 회장./박일호 기자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현재 ㈜한국야나세는 2013년 통영 옛 삼호조선을 인수해 한국야나세 통영조선소를 설립, 불황 속에서도 선박 수주와 건조를 이어가고 있다. 창원시 진전면 율티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해치커버(갑판), 라싱브리지(컨테이너 고박장치 및 통로) 등을 주로 생산하는 조선업체다. 대표적으로 세계 최초의 1만 8000TEU 라싱브리지 특허 등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산동성 연태에도 3A중공업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국내에 1000여 명, 중국에 400여 명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2014년 기준 매출이 800억 원에 이르는 건실한 기업이다. 그러면서도 쉼 없는 변화와 도전으로 꾸준히 성장을 모색하고 있다.

"사업의 기본은 돈을 버는 것보다 제대로 된 서비스나 제품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정인(正人), 정도(正道), 정품(正品)을 사훈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이 경영 측면에서 미래를 내다본 변화와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업은 10년 주기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초창기에는 헤치커버(갑판)을 제대로 만들어서 10년 넘게 먹고살았습니다. 그다음으로 라싱브리지(컨테이너 고박장치 및 통로) 기술을 개발해 만들었죠. 많은 컨테이너를 배에 효율적으로 착착 싣고 거친 바다를 운항해도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배에는 필요가 없지만 대형화되면서 확산했죠. 이제 다음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 환경을 중요시하면서 벙커C유 등 기름을 때는 배는 퇴출당하고 있습니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LNG선박입니다. 일본은 이미 출시를 하고 있고,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STX조선해양 등도 일부 시행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전성 탓에 중국 발주가 적을 것으로 보이는 화학제품 운반선에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계속 변화와 도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선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도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그나마 잘 버티는 편입니다. 저점을 찍고 1∼2년 뒤에는 조선경기가 분명히 살아납니다.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금강미술관 개관

㈜한국야나세는 지난 4월 29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금강미술관을 개관했다. 옛 금강제화 건물을 사들여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문을 열었다. 소장·보유하고 있는 작품만 1100여 점에 이른다. 이미 일부 기업이 갤러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지만 이것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다. 갤러리는 전시 판매가 주목적이지만 미술관은 일정 기준 이상의 자료를 보유하고 규모와 시설 요건 등을 맞춰야 하며 전시, 보존, 학술, 수집 등의 공익적 역할에 방점을 두고 있다.

"관심 분야가 그쪽이다 보니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것이 취미지요. 그렇게 작품을 감상하다 마음에 들면 사서 모았습니다. 점점 그 수가 늘면서 미술관을 설립하겠다는 꿈도 여물어 갔던 것 같고요. 한 20년 모은 게 1000점 이상 되더군요. 미루면 못할 것 같아서 실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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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9일 열린 금강미술관 개관식 모습./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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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9일 열린 금강미술관 개관식 모습./김구연 기자

그가 미술작품을 사서 소장하게 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술활동을 하고 싶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탓에 꿈을 접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예술청년 '우영준'을 돕겠다는 의미가 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어쩌면 불행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그림 그리는 인생을 살지 못했으니까요. 20대 후반 서울로 올라가 미술을 하다 접은 것도 돈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마산, 창원에 수많은 작가가 있지만 여전히 예술환경은 어렵습니다. 능력이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지요. 그렇다고 마냥 돕자고 작품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그 자체의 의미도 굉장하고요. 그림을 사주면 작가는 또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수 있죠. 의미 있는 생산을 돕는 거죠. 나아가 그 작품을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기면서 공유하면 감성을 충전하게 되고…. 그게 상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돈이 있어서 사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미술관 또한 창조와 공유를 통한 문화·예술 상생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문화, 예술 확산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기업가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잖아요. 작품 구매 등에도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하길 바랍니다. 또 금강미술관을 통해서도 많은 시민이 문화, 예술을 향유하고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

우 회장은 2014년 11월 1억 원 기부를 통해 40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에 이름 올린 것 외에도 다양한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국제로터리 클럽 활동을 하면서도 25만 달러(당시 3억 원가량)를 기부했다. 이 밖에도 메세나사업, 지역 학교 장학금 지원 등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하게 나눔을 실천해왔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술관에 이어 예술학교, 노인병원 설립 등을 꿈꾸고 있다.

"제가 죽기 전에 꼭 실현하려는 사회사업 목표가 세 가지 있습니다. 미술관은 이번에 개관하면서 성사됐고요. 그다음이 예술학교 설립입니다. 그동안 장학사업이 활성화되면서 일반 학생들은 실력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장학금 받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됐습니다. 예술 분야는 다르거든요. 여전히 양극화가 심합니다. 미술, 음악, 무용 등은 공부하는데 돈이 많이 들다 보니 재능이 있어도 엄두를 못 내거나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이 여전히 많죠. 제가 그 상황을 겪어봐서 잘 알죠. 그런 것 보면 안타깝습니다. 예술학교를 세우고자 고민 중입니다. 회사 수입이 생기면 조금씩 지원하고 하면 운영이 될 것으로 봅니다. 어디에 세울지 물색도 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설립해서 운영할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이 노인병원입니다. 제가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고, 촌놈이다 보니 어르신들 보면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들 때가 잦습니다. 급격히 노령화 사회가 되는데 국가 힘으로는 바로 대응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업들도 이런 부분에 관심을 두고 지원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요. 예술 학교를 설립하고 여력이 되면 꼭 설립해놓고 죽고 싶습니다. 저도 머지않아 노인 반열에 들지 않겠습니까. 죽기 전에 꼭. 허허."

그는 이처럼 팔을 걷고 나눔 활동에 공을 들이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에 옳다고 쭉 생각해왔고, 그게 보람을 느끼고 존재 가치를 높이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돈은 지금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소유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지요. 꼭 움켜쥐려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립니다. 충분히 누리고 사용했다면 그 나머지는 나눠야죠. 쓰지도 않고 모으기만 한 사람은 죽을 때 돈을 가져가지 못해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마음먹기 나름이죠. 다 나눠주고 함께 살다가 가면 좋은 소리 듣고 가는 길이 더 편하겠지요. 허허. 저는 나름 노력도 했지만 운이 잘 따라서 무탈하게 살았고, 사업도 더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제 노력 이상의 도움으로 잘 산 거죠. 그러니까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허허. 돈 쓰는 것도 다 방법이 다른데 저는 제 방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 회장은 최근 나눔 문화에 대한 세상 인식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더 좋은 세상이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의 동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딸 하나, 아들 둘을 두고 있습니다. 딸과 큰아들은 모두 아르바이트해서 자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까지 시키고 나면 그 뒤에는 더는 도와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회사도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회사는 엄연히 회사 재산이니까요. 강요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도 자기 능력대로 사회와 나누고 도와주고 살았으면 좋겠고요. 그렇게 조금씩 남을 배려하고 나누면서 살면 그 자체로도 행복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동참하길 바라고요. 특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써야죠.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 힘을 보태는 부분이 쑥쑥 늘어날 거라 내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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