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 가림막을 설치하는 순간 인권 유린된 겁니다"

진주에서 재미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진주같이'다. 생활정치 네트워크를 표방하면서 지역정당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지난 1월 서원명 전 경상대학교 교수가 공동대표로 뽑혔다. 3년 전 경상대 교수에서 정년퇴직한 서 교수는 최근 활발한 시민사회운동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세월호 참사, 진주의료원 폐원, 무상급식 예산 중단, 홍준표 경남도지사 주민소환운동 등 경남을 관통하는 주요 이슈에서 항상 중심에 서 왔다.

나도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나름으론 진주 지역운동에 관여도 했고, 사람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서 교수는 좀 의외였다.

그래서 대놓고 인터뷰를 제안했다. 주제도 정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인터뷰 주제를 알려달라"는 요청에도 어름하게 대답했다. "근래 진주지역 사회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루 알고 싶다"고 퉁쳤다.

지난 5월 6일 저녁, 진주시 강남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서 교수를 권영란 단디뉴스 편집장과 함께 만났다. 두어 시간 저녁 식사와 소맥을 함께하며 인터뷰한 결과 그는 '평지돌출'로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과문했던 탓일 뿐, 그는 일찌감치 '정의', '인권', '도덕' 같은 가치를 추구해왔다. 인생 몇 막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년퇴임 후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서 교수의 인생 스토리를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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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명 전 교수./정성인 기자

대화는 종횡무진. 80년대 경상대학교 상황에서부터 무상급식, 주민소환, 진주의료원, 세월호 같은 공적 주제는 물론 건강 관리 비법, 가족 얘기까지 종횡무진 넘나들었다.

그는 1948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3대 독자 집안에 아들로는 셋째, 순서로는 넷째였다. 2녀 3남. 맨 위에 누나가 있고, 그다음으로 형님 둘에 아래에 여동생이 있다. 스스로 "영어 수학만 잘했다"고 할 정도로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봉래초등학교, 진주중, 진주고를 거쳐 서울대까지 달렸고, 그때까지 스스로 '범생이였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인생 변곡점이 다가왔으니 1981년 갔던 미국 유학이었다. 캔자스 주립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총체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언론 통제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미국에 있던 그로서는 가감 없이 뉴스를 통해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 그때부터 부채의식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됐다고 했다.

그런 부채의식이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활동으로 이어졌고, 경상대학교 교수로 부임해서는 교수평의회, 민교협(민주화교수협의회), 교수회장 등에 관여한 힘이었다고 했다.

"기질 같은 게 있나봐"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정년퇴직한 그를 불러낸 것은 어쩌면 '기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국립대 교수로 정년을 지냈으니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삶이 보장돼 있었다. 스스로 '족보 있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테니스 실력은 빼어났다. 새벽 운동부터 마무리 운동까지, 운동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운동도 열심히 했고, '구조학'이라는 학문에 심취해 퇴직 후에도 공부할 거리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할 일이 있고, 좋아하는 분야가 있었으니 굳이 사회운동 같은 데 관심 두지 않아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꺼이 광야로 나왔고, 부부가 함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인터뷰하는 내게도 시민운동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있었던 때, 진주고등학교 선배(이정환 전 경상대 총장 동생이었던 이문환)가 이끄는 대로 가두행진에도 참여했고, 진주시청 앞에 가서 연좌농성에도 참여했다. 대학 시절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내 지난 삶에서 부딪히는 접점이 5·18 광주였어요. 그때가 막 내가 미국 유학 갔을 때였는데, 가서 보니 거기서는 적나라하게 보도가 되잖아요. 가슴을 쳤죠. 내 68학번 동기입니다. 김상진 열사가 있었어요.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공부 열심히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운동(Sports) 열심히 하는 '범생이'였어요. 그렇지만 어떤 '기질' 같은 게 있었나 봐요.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겁니다. 나가 보니 강의실 앞에 70~80여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맨 뒷자리에 가서 앉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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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명 전 교수./정성인 기자

경상대학교로 부임하고는 80년대 말, 대학평의회 설립에 함께했다. 교수노조 결성에도 관여했다.

"처음에는 저항이 대단했어요. 특히 농과대학은 경상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전부터 교수로 있던 노장 교수들의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뭐 논리도 대화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학장 직선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초대 농대 평의원이 된 나는 과거의 틀을 깨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특정 교수를 학장으로 내정해두고 박수로 추대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정해진 그분을 학장으로 선출하더라도 민주적으로 정해진 절차는 거치자'고 주장했습니다."

교수회 설립도 그랬고, 민교협 활동에서도 그랬다. 그의 '기질'이 많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은 그를 연구실에만 갇힌 '먹물'로 살아갈 여유를 주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사회의 이해' 재판정에 방청 가서는 막 서서 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그런 기질적인 게 있었겠죠? 그렇다고 해서 민교협 교수들하고 막 밀착해서 몰려다니고 그러지는 못 했어요. 그분들은 사회과학 쪽으로 열심히 했고 상당한 먹물 티가 많은 분들이었죠. 우리는 성명서 같은 것을 읽다 보면 아, 이 부분은 내가 동의하기 좀 그렇다 싶은 부분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만 빼고 서명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명은 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편치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노무현과의 인연, 그리고 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저변의 힘은 '노사모'에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노사모에서부터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열린우리당이 창당했을 때는 진주시 위원장도 했다.

"그때가 아마 11월이었을 겁니다. 아내가 맹장염 수술을 해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 로비에서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을 보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주 침울한 분위기였는데 나는 '와' 하고 막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그길로 시내로 쫓아 나와 연락되는 노사모 사람들하고 어울려 식당에서 퍼마시고 막 소리 지르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노무현재단 진주지회를 만들어 지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노무현재단은 정치집단이 아니었다.

"항상 재단 본부가 강조하는 게 정치적인 이슈, 정치적인 활동은 재단 이름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슈가 있다고 해도 자연인으로서 가서 서명도 받고 했지만, 재단 지회장으로서는 정치적인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지요. 진주의료원 폐원, 무상급식, 도지사 소환 문제 같은 데도 노무현재단 이름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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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명 전 교수./정성인 기자

그렇지만 올 초 '진주같이' 공동대표를 맡고부터는 자유로워졌다. 선명하게 생활정치를 내세운 단체이기 때문이다.

"유승민 의원이 그런 말을 했어요. '여러분이 뭘 얘기해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근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정치다'라고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를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 같은 경우, 저는 그런 걸 못 견뎌요. 피를 말리더라고. 인간의 존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냥 하나의 사고로 사람이 몇백 명 죽고 한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나라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건 나라도 아니다'는 것이었다고.

"남강 유등축제 가림막 문제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돈을 얼마나 받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거기다가 펜스를 쳐서 기본권을 박탈한다는 거죠."

"가림막,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예요"

"돈을 받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다가 펜스를 쳐서 기본권을 박탈한다는 거죠. 돈을 받기 위해서. 결국 인간의 존엄에 관련된 문제거든요."

지난 5월 3일 진주시청 시민홀에서 '진주남강유등축제 발전방안 모색을 위한 시민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창희 진주시장도 참가했고 서 교수도 토론자로 참가했다.

그 전까지 개천예술제 부대 행사였던 남강 유등이 축제의 주제가 된 것은 2000년 제1회 국제유등축제를 개최하면서부터였다. 2회부터는 진주유등축제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2014년까지 잘 해왔지 않습니까. 전면 유료화도 하지 않았고, 가림막도 치지 않았고, 인사사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에 갑자기 전면 유료화를 하고 이른바 '창희산성'이라고 불리는 가림막까지 등장한 거죠."

이창희 진주시장은 왜 반발이 있는데도 유료화와 가림막을 강행할까? 진주 시민은 축제를 유료화함으로써 축제 동안 받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데 왜 반발하는 것일까?

서 교수는 진주 시장 속내에 대해 "짐작은 가지만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반발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돈을 만 원 받는 것만 해도 화가 나는데 어느 날 다리를 지나가는데 울타리를 쳐서 안 보인단 말이야. 틈을 비집고 보고 올라가서 보고 그런 짓을 한 것 아닙니까. 거기서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를 느낀 것이죠. 내가 늘 봐오던 공간에, 소위 조망권이란 걸 침해를 당한 겁니다. 인간의 존엄이 훼손된 겁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 거죠."

정부 정책에 따라 진주시장도 갑갑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시민 중에는 유등축제 전면 유료화와 가림막 설치에 찬성하는 이도 있다.

"일부 사람은 그럽니다. 좋은 것 보려면 돈 내고 봐야지. 돈 내고 보게 하려면 울타리 쳐야지. 그런 얘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본질적인 문제를 따져봐야죠. 그래서 우리가 제안한 것이 울타리 안쳐도 된다. 제일 분노하는 게 울타리니까 일단 울타리를 제거하자고 한 겁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대안도 제안했다.

이창희 진주시장이 토론회를 개최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뭔가 전향적인 내용이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토론회에서 이 시장은 완고했다. 펜스를 지난해보다 더 예술적이고 예쁘게 치겠다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를 보면 브라질 리오축제라든지 일본 삿포로 눈꽃 축제라든지, 독일 옥토버페스트 맥주축제라든지. 그런 축제에서 어떻게 돈을 받습니까. 관광객이 참여하는 거죠. 리오축제 같은 경우 2㎞ 정도 되는 퍼레이드에 같이 참여해서 뛰고 굴리고 하는 거죠. 뛰고 굴리고 그러는데 돈 내라고 그러나? 독일 맥주 페스티벌 할 때 맥주는 돈 내고 사 먹을지 몰라도, 거기에 내가 보고 싶은데 돈 내고 보라고 하나? 눈꽃축제 거기 어떻게 돈을 받아요. 그대신 그 안에 콘텐츠가 기념품도 좀 사고 싶고, 가다 보면 여기 뭐 하는지 들어가보고 싶고 그러면 간단하게 돈 내고 들어가서 보기도 하고. 내 형편되는 대로 이것도 사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그렇게 내가 쓰는 거예요. 하지만 유등축제는 그게 아니고 들어갈 때 돈을 징수하는 거예요. 내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쓰는 것하고, 내가 들어가면서 징수를 당하는 것하고는 개념이 다른 것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이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진주시는 2014년 유등축제에 관광객이 280만 명 왔다고 했다. 나중에 거품이 낀 숫자라고 말은 했지만, 작년에 40만 명이 왔다고 밝혔다. 그중 15만 명은 진주시민 무료 입장이었고, 25만 명이 유료 관람객이었다고 했다. 이 같은 시 발표가 아니더라도 관광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꼈다고.

"우선 표가 나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화가 나는 것 아닙니까. 이건 도대체 장사가 안 된다. 심지어 작년까지 하루 100만 원 매출이었는데 이번에는 20만 원도 안 된다고 하소연 하거든요. 그만큼 사람이 줄었다는 것이고. 나부터가 공원 성지 앞 현대아파트 사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요. 축제만 되면 이 한 열흘을 어떻게 버티나 그 생각이었는데, 작년에는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그랬다니까요. 이창희 시장 표창이라도 주고 싶다고. 한 방에 해결하는구나."

부분적 유료화로도 충분히 수익 낼 수 있다

"사람들이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물론 돈이 없어 못 오는 사람도 있겠죠. 생각해 보세요. 매년 즐기던 축제를 진주시민이라도, 관광객이라도 내가 돈이 없어서 못 본다? 나는 그게 있을 수 없다고 봐요. 돈이 없어서 못 본다는 게 싫은 거예요. 바빠서 못 본다거나 그런 거는 있을 수 있지만, 돈이 없어 차별을 당한다? 그건 참 슬픈 일이죠."

그래서 서 교수는 부분적 유료화를 제안했다. 지난해에는 입장 통로를 9곳에 마련하고, 입장료 1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유료 관람객을 유도하고자 유등이 띄워진 남강 전체를 둘러싸는 가림막을 설치했던 것. 하지만 부분적 유료화는 2014년까지도 했다. 남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통행료를 받았거나, 체험 부스에도 참가비를 받았다.

"남강 부교 지나가는데 1000원을 받는 겁니다. 안 지나가도 되거든요. 한 번가면 1000원, 두 번 가면 2000원 세 번 가면 3000원. 이렇게 하면 형편 되는 사람은 지나갈 것 아닙니까. 지나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기념품 사고, 소망등 한 개 만 원이잖습니까. 거기에 가족들 이름 달고. 내가 그날 대안으로 2가지 안을 냈는데 그 수입이 충분히 들어와요."

유료화하면서 이전에 하던 것을 무료로 해버렸다. 부교나 체험활동비, 성지 입장료. 진주성 입장료도 축제 기간에는 받지 않았다. 이런 것을 원래대로 유료로 운영하면 가림막 설치비와 매표소 운영 경비를 아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외지 관광객이 남강 유등은 공짜로 볼 수 있다 할지라도, 평소에는 2000원 받는 진주성 안에 차별화된 콘텐츠가 있다면 5000원을 내고라도 들어가 보려 할 거라는 얘기다.

시는 지난해 40억 원을 써서 32억 원 수익을 올렸다고 밝혔다. 재정자립도 80%다. 서 교수는 "하지만 성지 입장료 2000원 받고, 그 밖에 부교나 체험비를 받고 하면 27억 원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수입은 5억 줄어드는 대신 가림막 설치비나 입장권 인쇄비, 게이트 운영 인건비 등을 고려하면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어 비슷하게 되지만 관광객 숫자가 훨씬 늘어나므로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축제라는 게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고, 사람이 신바람이 나고 해야지. 가림막을 쳤다는 건 벌써 생명을 끊어버린 거예요. 생명의 연속성을 끊어버린 거예요. 여기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축제가 되리라고 바랄 수 있습니까. 축제가 정말 콘텐츠가 알차고 유명해진다면 세계적으로 관광객이 밀려온다는 거예요. 거기서 생기는 수익은 별거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기서 쓰고 가는 관광비, 숙박비, 음식비, 교통비, 선물구입비, 체험비 이런 게 다 진주에, 대한민국에 떨어지는 수입입니다. 관람료 몇 푼 받아서 어떻게 해보겠다? 너무 지엽적이고 촌스럽잖습니까?"

그러면서 '도덕성' 얘기도 했다.

"너무 유치하고 군색한 변명만 하고 있어요. 도덕성이 있는 사람들인가 싶어요. 지방행정이든 어쨌든 정부라는 것이 도덕적 우월성에서 훨씬 앞서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온갖 양아치들이 변명을 늘어놓는다고요. 국가가 걸출한 도덕성 가지고 있으면 걔들이 발을 못 붙여요. 지금 하는 걸 보세요. 시민안전을 위해 가림막을 쳤다? 도대체가 말이 안 돼요."

"줄 세우고 차별하는 것을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근본적으로 제가 싫었던 게 '이명박근혜' 정부가, 수구꼴통들이 하는 방법이 뭐냐, 줄 세운다는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줄을 세웁니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이 65세 이상에게 20만 원씩 주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중에 형편이 안되니 내놓은 게 뭡니까. 하위 70%만 지급하겠다. 결국 70%든지 80%든지 90%든지 줄 세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와서 나 주세요, 나 이리 어려우니까 나도 주세요 그렇게 손을 벌리고 그래 그럼 니가 몇 번째냐? 그렇게 줄 세워보고 주겠다는 거잖아요. 이게 너무 싫은 거죠. 만약 돈이 없으면 내가 20만 원 주겠다고 했는데 15만 원밖에 못 주겠다. 순차적으로 해서 20만 원 달성시키겠다. 그게 맞는 것 아닙니까?"

무상급식 지원 중단도 그 줄 세우기와 다름없다고 했다. 서 교수는 유등축제 유료화에도 '서열화'가 개재됐다고 말했다.

"서열화가 다른 게 아닙니다. 한마디로 누가 예쁜 놈이냐는 겁니다. 누가 예쁜 짓을 하느냐 빵 하나 더 주고, 아니면 아예 굶겨버리는 겁니다. 옛날 군사정부 시절에는 두들겨 패서 시켰는데 최근 '이명박근혜' 정부 이래로 아예 안 주고 굶겨버리는 거죠."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재정자립도가 취약한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기려고 줄 세우려 한다는 것이다. 예산 절감, 수입원 발굴 등을 통해 줄을 세우고, 성과에 따라 지원을 차등화 하겠다는 의도라는 것. 지방자치단체장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인간에 대한 차별"이라고 말했다.

"너는 여자니까 빠져. 너는 돈이 없으니까, 너는 말이 많으니까 빠져. 이리저리 빼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다 거둬 안아야 되는 건데 보수라는, 말이 보수지 대한민국에 보수가 어디 있습니까. 수구꼴통이라고 하는데 걔들 기질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일이라면 내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야한다는 그런 생각이죠."

"홍준표 논리는 왜 삼성의 손자도 공짜로 먹고 이게 말이 되냐 하는 얘긴데, 공짜로 먹는 게 아니죠. 같이 먹는 거죠. 그 돈 얼마나 든다고. 근데 그걸 또 줄을 세우겠다는 거잖아요. 학교 교문 앞에 가면 크게 써 붙여서, 지원해준다고 신고하라는데,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애들 자존심이 얼마나 셀 땐데, 부모들하고 갈등하고 친구들하고 위화감도 있을 것이고. 나는 그런 것을 못 견디겠어요. 그래서 내가 거기 관여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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