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죽기야 하겠어? 비장한 각오로 여행을 결심했지요!"

제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길)를 알게 된 것은 8~9년 전이었어요. 신문에 실린 까미노 화보와 기사는 저를 단번에 사로잡았고 가슴을 뛰게 했어요. 첫눈에 반한 거죠. 그때부터 저의 까미노 앓이는 시작되었답니다. 가톨릭 신자지만 누가 성지순례를 간다, 유럽을 간다 해도 특별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이곳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길을 꼭 가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긴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에요. 지금부터 영어도 되지 않는 50대 중반 아줌마의 무모한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기를 시작해 볼게요.

'까미노 데 산티아고' 가 뭐야?

응? 까미노? 여기가 어디지? 하시는 분들을 위해 잠깐 말씀해 드리고 갈까 해요. 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 길을 세상의 사람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다시 말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말하는 거예요. 스페인어로 까미노(Camino)는 길, 산티아고(Santiago)는 야고보 성인을 말하지요.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가 걸었던 길인데, 1000년 넘게 수많은 순례자가 걸었던 길이죠. 이길 끝에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라는 도시가 있어요. 이는 '야고보(산티아고)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란 뜻이에요. 이 도시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처음 이 길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목적이었어요. 그런데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셨고,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 1947~)라는 브라질 작가가 이 길을 소재로 <순례자>라는 소설을 쓴 후로 더더욱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지요. 지금은 종교와 무관하게 수많은 사람이 이 길을 걷고자 찾아온답니다. 오래전에는 일 년에 400명 정도 오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성수기 하루에만 400~500명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해요.

아, 맞아요! 제주도 올레길도 까미노를 걷고 온 서명숙(제주올레 이사장) 씨가 영감을 얻어 자신의 고향에다 만든 것이래요.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금 우리나라엔 수많은 길이 생겨났고, 걷기 열풍 또한 거세지요. 그만큼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지금도 전 세계로부터 많은 이들을 불러들이는 길이죠.

약 800㎞로 이루어진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하루에 평균 25㎞ 정도 걷게 되고 32일 정도 걸리는 길이에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고 향하는 순례길은 크게 12개 정도 있는데, 박미희 씨는 이중 사람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고 지금도 가장 많은 이들이 걷는 '카미노 데 프란세스', 일명 프랑스길을 걸었다. -편집자 주) 물론 개인차는 많습니다. 800㎞에는 좁은 길, 넓은 길, 산길, 찻길, 돌길, 언덕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올리브밭, 포도밭, 해바라기밭, 밀밭 등이 끊임없이 이어진답니다. 예쁜 돌집, 이름 모를 꽃, 깨끗한 물이 흐르는 크고 작은 강, 또 작은마을, 큰 도시 등을 두루 지나는 그야말로 스페인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스페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길이지요.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서로 나누고 걱정해주고 배려해주며 친구가 되는 정말 신기한 길이랍니다. 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전 그 길이 너무나 그립네요. 지금도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근데 내가 진짜 갈 수 있을까?

이렇게 산티아고는 알게 되었고 너무 가고는 싶지만, 그땐 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가고 싶은 마음이 퇴색될 법도 한데 갈수록 더욱 까미노가 그리워졌어요. 그래서 20여 권의 산티아고 기행문을 읽으면서 가고픈 마음을 달래고 대리만족하며 지냈지요. 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지요. 열심히 하던 식당일을 그만두고도 바쁜 일은 계속 되었고 여유를 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내가 산티아고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았지요. 사실 주부가 두어 달이나 집을 비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50대 중반 나이에, 동네 이장도 맡고 있고, 여행 경험도 별로 없고, 무릎도 살짝 아파지기 시작했고, 거기다 남편이 많이 아파 수술을 받고 함께 병원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해야 했고 먹는 것도 늘 신경을 써 줘야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거기다 금전적인 부분도 걱정이 되었고요. 또 가장 큰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영어가 되지 않는 거였죠. 까미노를 염두에 두고 문화센터 영어 회화반에 등록하여 공부를 해봤지만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까먹는 실정, 능률이 안 오르니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너무 정신이 없어져 치매 검사를 받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아직은 치매가 아니래요.) 그러다 영어공부는 포기를 하게 되었고 아마 중요한 영어가 되지 않으니 다른 여러 가지 핑계가 생긴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지난 설에 집에 온 큰딸이 직장일로 아주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빠, 엄마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저희는 깜짝 놀라 '네 인생인데 네가 결정 할 일'이라고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로 사표를 내 버렸더라고요. 무엇을 하며 머리를 식힐까 고민을 하기에 딸도 관심이 있어 하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라고 제가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어요. 딸도 흔쾌히 받아들였고 지난 3월에 산티아고를 걷고 오게 되었답니다. 다녀온 후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자신감도 생겼고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는 말을 하며 엄마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며 꼭 다녀오라고 권하더라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안 되잖아요! (ㅠㅠ) 그 후로 저는 더욱더 까미노 앓이를 심하게 하게 되었어요. 머릿속에 온통 산티아고 생각뿐이었지요. '어떻게 하면' 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유럽으로 가족 여행, 바로 이때다!

마침 가족 유럽여행이 작년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이 올해로 입사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모든 남편들이 그러하듯 우리 남편도 30년 동안 가족 건사하느라 너무너무 수고 많이 했고 거기다 병까지 생겨 많은 고생을 했지요.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지만요. 그리고 저 또한 남편이 저지른 일(?)이 있어 식당도 해봤고, 또 남편 병구완하느라 조금은 바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남편 회사에서 입사 30주년이라고 휴가를 줘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거예요. 마침 작은 딸아이가 독일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딸도 만날 겸, 렌터카를 빌려 2주 일정으로 유럽 여기저기를 둘러볼 예정이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계획이었지요.

그래요, 이번 여행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계획은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도 덜 뜬 김에, 유럽까지 간 김에 까미노를 걷고 오자고 마음먹고 이제 갈 수 있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40일 집을 비운다고 남편의 병이 더 악화하는 것도 아니고, 무릎 아픈 것이 앞으로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고, 맡은 이장일은 지장이 없도록 동네 분에게 부탁해 보고, 돈은 아직 젊으니 갔다 와서 어떻게 해보기로 하고, 평생 공부한다 해도 영어가 능통해 지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 지금이 나의 일생 중 가장 젊은 나이 아닌가! (이 말은 몇 년 전 지리산 종주를 망설일 때 큰딸이 나에게 용기를 해줬던 말이랍니다.) 거기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왜 손을 뻗지 않는가, 꿈이 거기에 있는데'라는 말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았고 또 '여행은 돈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말도 내 편을 들어주었어요. 와~! 난 단지 가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였어요. 이렇게 마음먹으니 두려운 마음은 사라지고 이제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거기에다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 없을 때 나 혼자서도 잘 있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하는 남편과 '엄마도 할 수 있어, 그리고 엄마 대신 아빠 자주 찾을게' 하는 딸의 응원이 또한 저를 그 길에 서게 했지요.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둑길을 매일 걷고, 먼저 갔다 온 딸의 조언을 들어가며 까미노에서 이용할 번역 앱, 길찾는 앱 등 필요한 앱을 깔고 준비물도 챙기고, 남편이 여행 후 먹을 수 있도록 (남편은 아무에게도 자기를 부탁도 하지 말고 음식도 만들어 놓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음식을 장만해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담아놓고 동네 일은 믿을 만한 분을 찾아가 부탁해놓고 책도 다시 읽어 마음에 담고 적었고 또 기도도 많이 했어요. 남편도 걸으면서 들을 좋은 음악을 많이 휴대전화에 담아 주었지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읽으며 마음의 준비도 했습니다. 여행 중 만나는 친구들에게 나눠 줄 태극기 배지도 40개 주문하고 시장에서 천을 떠다가 순례 후 동네 구경할 때 입을 한국을 알릴 수 있는 한복 원피스도 만들었답니다. 한복 만드는 분이 예쁘게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까미노 길을 걷는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분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책도 사주고, 영양제도 챙겨주고, 비상약도 챙겨주고, 같이 걸어도 주고, 기도도 해 주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챙겨 주시는 그분들 때문에 더욱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 결정했다고 볼 때마다 힘을 주시는 분들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고 더욱 잘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걱정, 걱정 또 걱정

사실은 결정을 하고도 처음엔 두려운 마음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리고 죽는다 한들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지' 하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각오가 비장했던지 친구 셋이 하는 모임에 총무를 맡고 있는데 내가 혹시 못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첩까지 친구에게 주고 갔답니다. (나중에 돌아와 친구들이 제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지요.^^) 물론 쉽지 않을 거란 건 대강 알고 있었어요.

책에 보면 날씨는 덥다지, 등의 짐은 무겁다지(8~9㎏), 숙소는 열악하다니, 관절에 물집에, 힘든 의사소통에,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 것 같긴 했어요.

주변 사람들도 걱정이 되어 다음 기회에 다른 이와 함께 걸으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난 어쩐지 이 길 만큼은 혼자 걷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 왔습니다.

함께 가려고 했다면 일행을 찾을 수도 있었고 딸이 걸을 때 함께 걸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소에 두 딸이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늘 입버릇처럼 '참 부럽다'라고만 했는데 나도 그런 걸 꼭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그게 참 무모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가끔 느낀 적도 있었지만 그게 또한 얼마나 잘한 일인지도 알겠더라고요.

가기로 하고 맘은 먹었는데 또다시 큰 걱정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막상 순례길에서는 어떻게 걸을 것 같은데, 출발지인 생장 피에드 포르(Saint-Jena-Pied-Por.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 있는 작은 도시-편집자 주)까지 찾아가는 것이 걱정되는 거예요. 저뿐 아니라 남편도, 딸도 그게 걱정이었죠. 딸이 먼저 갔다 왔으니 최대한 힘이 안 들게 찾아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고는 해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너무나 걱정이 되었어요. 준비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아마 몇 배 힘은 들었을 거예요. 여행 후 갔다 와서 먹을 남편 음식 챙기기, 독일에 있는 딸 갖다줄 음식 챙기기, 2주 렌터카로 여행할 짐 챙기기, 내가 지고 걸을 배낭 챙기기, 체력 챙기기, 동네 일 챙기기 등,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했답니다.

드디어 6월 6일 우리 가족은 유럽으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큰딸은 순례길을 다녀오고 바로 직장이 생기는 바람에 길게 휴가를 쓸 수 없어서 우리 부부만 독일로 향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니 작은딸이 밝은 얼굴로 마중을 나왔더군요. 1년 만에 만난 우리는 부둥켜안고 벅찬 재회를 했어요. 딸의 집에서 하루를 자고 작은딸과 나, 남편 우리 셋은 렌터카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로마, 이탈리아에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어요. 전 유럽이 처음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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