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실천하는 '아저씨 천사'

'아름다운가게 창원용호점' 간사인 최명(43·창원시 마산합포구) 씨는 나눔을 실천하는 이로 유명하다. 특히 헌혈은 곧 습관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300회를 했다. 혼자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거리로 나서 헌혈 홍보를 하기도 한다. 이번 인터뷰에 응한 것도 헌혈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번은 교통방송 리포터가 저를 인터뷰하고 나서 헌혈 인증사진을 보내줬어요. 남석형 기자도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는 헌혈증 가져오면 인터뷰하는 거로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헌혈, 그리고 '유진'이라는 두 아이

최명 씨는 2002년 100번째, 2008년 200번째, 그리고 지난해 12월 300번째 헌혈을 했다. 도내에서 두 번째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이다.

"전혈·혈장·혈소판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혈소판 수치가 낮아서 2주에 한 번 혈장, 두 달에 한 번 전혈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700회 넘게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횟수에 관심을 두지만, 자기 관리 잘해서 건강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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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 아름다운가게 창원용호점 간사./남석형 기자

그는 혈액원 요청으로 경남헌혈사랑봉사회장을 맡고 있다. 정기적으로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거리 홍보를, 봄·가을에는 자전거로 이동식 캠페인을 한다. 신문 기고 글도 때때로 쓴다. 여동생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을 때는 두말하지 않고 'OK'했다. 헌혈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헌혈자가 300만 명 가까이 됩니다. 예전보다 수는 늘었습니다. 하지만 출산율이 줄어들면서 25년 후에는 피가 부족할 거라고 합니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필요한 거죠. 헌혈은 청소년 때부터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먹었을 때 곧바로 해야 합니다. '내일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하기 어렵죠. 올해, 이번 달, 그리고 오늘 한 번만 헌혈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 온 헌혈차량에서 처음 피를 뽑았다. 이후에는 헌혈하면 주는 '○○파이'와 같은 간식이 생각나면 종종 했고, 그것이 곧 습관으로 이어졌다. 물론 헌혈에 대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하게 된 일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 얼굴이 떠오르는데요…. 백혈병에 걸린 소녀가 헌혈증을 구한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제 것, 주변 사람 걸 모아서 달려갔습니다. 아픈 친구인데도 아주 밝고, 자신보다 엄마를 더 챙기더군요. 도우러 갔다가 제가 감동 받고 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친구 소식을 수소문했습니다. 재발해서 다시 수술이 필요했는데, 돈이 없어 시기를 놓치면서 하늘나라로 갔다더군요. 저는 '헌혈증을 좀 더 많이 주지 못해 그렇게 됐나'라는 괜한 자책을 했죠. 이후로 헌혈을 더 열심히 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권유하게 됐습니다."

그 친구 이름은 '유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명 씨는 또 다른 '유진'이를 만나게 된다.

"라디오에서 진해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 심장병 때문에 헌혈증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름이 '유진'이라는 겁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 유진이가 시켰나'라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번에도 곧장 병원을 찾아 헌혈증을 전했죠. 이후에는 지난번 트라우마 때문에 그 친구 소식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진해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 병상일지를 썼는데, 완쾌됐다는 사연이 나왔습니다. 끝까지 들어보니 그 학생이 제가 알던 '유진'이었습니다. 정말 기뻐서 사람 많은 곳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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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 아름다운가게 창원용호점 간사./남석형 기자

넉넉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최명 씨는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성호초-마산중앙중-창원고등학교를 나왔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어릴 때는 특히 내성적이었다.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밀린 월세 때문에 주인 할아버지한테 잔소리 듣는 게 너무 싫었죠. 집 천장에는 쥐가 많았어요. 여동생이 너무 무서워했죠. 한날은 제가 천장을 다 뜯어서 새로 합판을 붙여 쥐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미술가 꿈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소질이 없다고 자책하며 포기했다. 그림을 미술학원 선생이던 사촌 형에게 보여줬는데, 꾸지람만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진학 때는 도시공학과에 관심을 뒀다. 고향 마산에 대한 애착이 컸기에 도시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 타 지역 대학에 가야 했는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차선으로 택한 것이 경남대 건축공학과였다. 건축 공부를 하면 좋은 집을 손수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막상 대학 들어가서는 학과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졸업 이후 한동안 아버지가 하는 이삿짐센터 일을 도왔다. 2006년부터는 4년 동안 마산어시장 홍합 도매점에서 일했다. 이때 일 열심히 하는 독종으로 소문났다.

"막 결혼하고 나서 마산어시장에서 일했죠. 딱 두 가지만 보고 들어갔습니다. 생계가 될 정도의 급여, 그리고 봉사활동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됐어요. 밤 12시 출근해 오후 2시까지 일하고, 오후에는 봉사활동을 했죠. 그런데 한날은 배가 너무 아픈 겁니다. 그 상태로 출근했죠. 꾹 참고 40kg씩 되는 홍합 망을 옮겼습니다. 나중에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해서 창원삼성병원에 갔더니 맹장이 터졌다는 겁니다. 그게 주변 사람들한테 소문난 거죠. 실제로 다른 업체에서 돈 100만 원 더 줄 테니 오라고 했어요. 하지만 안 갔어요. 당시 일하던 곳 사장님이 제 또래였는데, 기부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저랑 잘 통했거든요."

2004년 아름다운 가게와 인연

최명 씨 인생에서 봉사활동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헌혈을 정기적으로 했듯이 이전부터 나눔에 대한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아는 형님이 소년소녀가장 돕는 일을 하자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대학 들어가서는 교통장애인협회·지체장애인협회 같은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한번은 수화공연을 봤는데, 수화 자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남농아인협회에 찾아가 수화도 배우고 '손사랑'이라는 동아리에서도 활동했습니다. 농아인이면서 중증장애인인 아저씨 목욕 시켜드리는 일도 했고요. 마산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 도시락배달도 했는데요, 아버지 이삿짐 일할 때 사람들이 버린 것 있으면 주워서 가져다 드리기도 했죠."

최명 씨는 현재 '아름다운 가게-창원용호점' 책임자로 일한다. 아름다운 가게는 기증한 물건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사회에 돌린다. 2004년 이곳과 연을 맺었다. 경남여성장애인연대에서 활동했는데, 이 단체가 아름다운 가게를 공동운영하게 되면서 마산점에서 활동천사로 움직였다. 2009년에는 아름다운 가게에 정식 입사해 마산점 담당 간사가 되었다. 지금은 올해 개점한 창원용호점을 맡고 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매장을 지킨다.

"정말 열심히 일할 때는 '최명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물류 구축 경험도 있고 하니, 전국 다른 매장에 지원을 나가기도 합니다. 내일, 남의 일 안 가리고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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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 아름다운가게 창원용호점 간사./남석형 기자

나눔에 대한 끝없는 고민

최명 씨는 수화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만난 아내, 중학생·초등학생 두 딸을 두고 있다. 아내 역시 나눔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고, 헌혈도 지속해서 한다.

가족은 지난 2005년부터 '걷는 사람들'에 참여해 지역 곳곳을 다닌다. 최명 씨는 이를 통해 '보행권' '걷기 좋은 도시' 같은 문제에도 눈길을 두고 있다. 또한 귀농에 대한 생각도 많다. 물론 이 또한 가족들만을 위한 건 아니다.

"자연에서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보다, 농촌에 도움될 수 있는 역할이 뭘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다. 마산 인근 농촌에 펜션을 지어서 도시 나눔 대상인 어려운 분들이 무료로 이용하도록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청소하시는 분들이 며칠간 여기 쉼터에서 쉬고, 그분들 일은 자원봉사자들이 대신하는 거죠."

그는 누구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물질·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 또한 나눔이라고 한다. 요즘 봉사활동 분위기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있다.

"저희 때는 도시락 싸가서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요즘은 학생 자원봉사가 마일리지화 되고, 또 하나의 스펙쌓기인 듯해서 아쉽습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일부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가난했으니 돈에 대한 욕심이 당연히 있죠. 아버지 이삿짐 일이나, 마산어시장 일만 하려 했으면 그리했겠죠.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몸과 마음은 이미 다른 활동을 하고 있더군요. 무엇을 하든 봉사를 해야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헌혈은 나눔활동에 대한 초심이 흐트러질 때 다잡아 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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