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나로 모진 35년 세월 버텼다

80년대. 지역에 집회나 시위 현장은 물론이고 시민사회단체 각종 행사장에 약방 감초처럼 함께하는 이가 있었다. 얄팍한 자료집 같은 걸 시집이라면서 1000원을 받고 팔기도 했다. 2015년인 지금도 그는 어김없이 각종 행사장에 나타난다. 뒤풀이 자리까지 함께하기 예사다. 그래서 좀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도 한때는 중등학교 국어교사로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군 형무소에서 2년을 복역했으며 교사에서 해직당했고, 교사 자격증마저도 무효화 됐다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살아온 세월이야 또 어땠겠는가. 2년 전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이후 재심 신청을 해두고 있는 유동렬(61) 시인은 이제야 신방을 차릴 달콤한 꿈에 빠져있다.

긴급조치 9호, 2년을 옥살이

'내게 시는 곡기와 같다/한 며칠 끊으면/힘이 쏙 빠져버린다/머리가 텅 빈 듯/뭔 생각이/떠오르질 않는다/시인의 숙명이런가/원고료도 없는/시를 쓰고 올리면서/지새운 밤은/몇몇 해나 되었나/머잖아 또 한 권의 시집을/펴낼 작정이다/재심 재판이 어서/끝나면 오죽 좋으련만/그 전에 낼까 말까/고심하는 시인아/한때 통일시 한 편/써서 부치다가/긴급조치 9호에 걸려/징역 2년 받은 적 있지/교사 해직도 당했던/유신시대처럼/표현의 자유조차/위태로운 시대이다/정설교 시인이 잡혀갔다/천안함 영화가/상영금지 되었다/사람이 곡기를 못 끊듯/고난 속에서 꽃피는/올곧은 시를/나는 계속 쓰고 싶다'

유동렬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길이 보이지 않는 거기서 길을 내> 175~176쪽에 걸쳐 실린 시다. 개인사를 알기 전에는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와 인터뷰를 하고 보니 이보다 그의 인생을 잘 드러낸 시도 없겠다 싶다.

그는 1978년 부산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는 3월에 전남 광양군 진상중학교로 발령받아 갔다. 거기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은 전혀 짐작도 못 했고, 그렇게 세상사 풍파로 뛰어든 것이었다.

01.jpg
▲ 유동렬 시인./박일호 기자

"대학 졸업하면서, 당시는 사범대 졸업생은 무조건 교사로 발령내줄 때였으니까, 희망을 중국 연변하고 전남으로 적어냈어요. 이상하게 그 당시 부산·경남이 보수적이고 문학 자체도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이 주류였거든요. 그게 답답했어요. 또 민요나 판소리 이런 데 관심도 많았기에 전라도로 가게 된 거죠."

마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대 졸업까지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가 처음 맞닥뜨린 농촌 현실은 그의 생각과 너무도 달랐다. 대학 때 <창작과 비평>이니 <씨알의 소리>니 당대 진보 잡지를 열심히 읽기도 했고, 밥 굶어가며 시집을 사서 일기도 했지만 아직은 그의 문학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덜컥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당시 대통령 선거권을 갖고 있던 통일주체 국민회의 관련 깃을 가슴에 달라고 했는데 그는 라이터로 그 깃을 불살라버렸던 것. 그 일로 그는 감봉 6개월 징계를 받고 전남 완도군 신지서중으로 좌천됐다. 완도에서도 배를 2시간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낙도였던 것.

섬 생활에 적응도 하기 전, 그는 군대에 가야 했다. 7사단으로 화천에서 보병 생활을 하던 중 시 한 편이 덜컥 보안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선 민주화 후 통일을 논조로 해서 쭉 썼는데 보도연맹 등 역사적으로 민초들이 고충 받았던 것, 여공들이 고문당하고 노조하다 잡혀가고, 민주열사들이 투옥되고 하던 것들을 쭉 쓴 시였다. 그 속에서 단어 한두 개 잡아서는 유언비어 유포라 해서 징역 4년 구형을 받았다.

"당시 백낙청 교수가 주도하던 <창작과 비평>은 '선 민주화 후 통일' 논조를 펴고 있었어요. 나도 거기에 심취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취지로 시를 한 편 써서는 집으로 부쳤어요. 그게 보안검열에 걸린 겁니다. 그때는 보안검열이니 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지요. 그 시 한 편으로 많은 사람이 고생했습니다. 중대장은 물론이고, 위병소 근무자까지 죄다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으니까요."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 재판 과정에서 그는 백낙청 교수를 증인으로 불러 달라고 하며 다퉜지만 반공법 위반 혐의는 벗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선 민주화 후 통일은 <창작과 비평>과 백낙청 교수의 논조다. 거기에 따랐을 뿐 긴급조치란 게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어요. 또 시 전체 맥락은 보지 않고 단어 몇 개로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다퉜지요. 하지만 판사는 '교사까지 하다 온 사람이 긴급조치를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반공법은 빼줄 테니 2년간 감방 가 있어라' 하면서 선고하더라고요. 바로 헌병에게 잡혀서 군 형무소로 끌려갔죠."

흔히 '남한산성'으로 불리는 군 형무소야 악명 높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교사 출신이래서 남들보다는 편하게 복역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일화 한 토막.

"월북하겠다고 안개 낀 밤에 길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군 초소 앞에 와서는 귀순하러 왔다고 했다가 잡혀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비롯해 숱하게 총살당했죠. 새벽이면 가끔 총성이 들려왔는데 그게 총살한 거라더군요. 보안이 엄중해 사연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또 한 생명이 갔구나' 생각하곤 했지요."

그렇게 2년을 채워갈 무렵 차지철하고 김재규하고 총싸움을 했기에 그도 풀려날 수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출소 후 남은 군 복무 기간을 채워 복무해야 했지만 그냥 전역시켜주더라고 했다. 당시 같이 풀려난 사람들 중에는 강제 징집당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과 함께 풀려나고 전역까지 하게 됐던 것.

02.jpg
▲ 유동렬 시인./박일호 기자

그리고 80년 초 신지서중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부정한 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집요했다. 복직하고 얼마지 않아 광주민주항쟁이 터졌다. 그로서는 앞서 깃을 불사른 사건으로 받은 감봉 6개월 징계가 겨우 끝나고 이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으려던 때였다. 그에게 해직 통보서가 날아들었다.

"전두환이 들어서면서 국보위를 만들고 옛날에 문제 있는 교사와 공무원들을 싹 다 자른 거야. 616명이 공무원 해직을 당했는데, 내 죄명은 현실 불만 교사라더라고. 자기들 말로는 공무원 숙정인데 내가 볼 때는 억울했지."

완도 교육청에 불려 갔더니 사직서를 쓰라고 했다. 안 쓰면 삼청교육대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고인 물은 썩는다. 언젠가는 정의는 이긴다'라고 써놓고 왔다. 그게 시말서이자 사직서였던 셈.

"그걸 보고 와 겁나게 써놨네 하는 사람도 있고 잡혀가겠네 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렇게 써놓고 왔지. 그러고도 억울해서 전남도 교육위원회에 장학사 만나러 갔어. 왜 내가 해직돼야 하느냐고 따지려 했던 거지."

하지만 장학사는 그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서류 한 장만 보여줬다. 거기에는 '불온한 시를 써서 복역한 사실이 있음' 딱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학원 강사로,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해직되고 그는 광주 등지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가 그해 늦게 마산으로 돌아왔다. 마산으로 왔지만 딱히 먹고 살 길도 없고, 직업을 바꿔보려고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학원 강사도 하고, 마산고 동문회보 편집 일을 맡아서 호구책으로 삼고 있었는데, 박진해 씨가 창신고에서 교사를 모집하니 한 번 응모해보라고 권유했다. 공립에서 해직됐으니 공립에 다시 취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사립은 괜찮겠지 싶어 응시했다가 합격했다. 그래서 2학년 담임도 맡고, 한문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에게 행복은 잠시였고, 불행은 집요했다. 당시 국립 사범대는 등록금도 쌌고, 졸업 후 의무 발령이었지만, 4년간은 교사로 복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강제 해직당하면서 4년 복무 의무를 지킬 수 없게 된 것. 교사 자격이 취소됐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학교 서무실에서 와보라고 해서 갔더니 교사 자격이 취소됐다는 겁니다. 이미 빨간 줄이 죽 그어져 있더라고요. 의무복무를 다 하지 않아서라고 하니 어떻게 할 방법도 없고 다시 해직됐죠."

그다음부터는 주로 학원 강의도 하고, 출판사 영업도 하면서 생활했다. 교사로서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하고 환경기사가 돼서 기업체에 취직하기로 마음 먹고 환경기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부산대 교수가 학원을 소개해줘서 부산에서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03.jpg
▲ 유동렬 시인./박일호 기자

그러다가 당시 박진해 씨가 맡고 있던 무크지 <마산문화>를 통해 등단했다. 큰 시련에 빠진 후배를 안쓰럽게 여겨 등단시켜 준 것이었다. 그때 추천받은 시가 '배추꽃'하고 '희망과 힘'이었다.

그때만 해도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한때는 한 달 월급이 1100만 원을 넘은 적도 있었다고. 한창 논술 인기가 뜰 때였는데 하루 8시간씩 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학원 쪽으로 꾸준하게 근무를 못 하는 게 중간중간 우리가 또 데모는 해야 하잖아. 당시 학원 봉급, 출판사 봉급 받은 것 데모 지원에 많이 썼어요. 요새는 어디 가면 한 잔 얻어 마시고 술값도 안 내고 그러지만, 그때는 돈을 엄청 많이 썼어요. 많이 쥐여 주고 알게 모르게 지원도 해주고. 만약에 데모를 안 하고 그 직장에서 그대로 있었으면 지금은 조그만 아파트 한 채는 벌써 샀지. 마산고 부산대 동문회 일도 해서 인맥이 좋았거든요. 시집을 내면 지역사회도 있지만 동문들 인맥이 있어서 시집이 그런대로 팔렸어. 그래 빨리 인쇄비 메꿔놓고는 줄 사람에게는 주고 하면서 다음 작품 구상하고 그랬지."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른바 시집의 '민중적 유통'이었다. 84년부터 10~20여 편 시를 묶어 간단한 시집을 만들어서는 현장에서 유통한 것이다. 1000원을 받고 팔았는데 활동가나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기도 하면서.

"1000원 해서 현장에서 신속하게 보급하고 현장에서 읽혀야 한다는 생각에 손으로 막 인쇄해서 보급하는 게 민중적 유통구조라 했어요. 일반 서점에 놔두고 파는 게 아니고, 지역에서 항상 내가 현장에 있으니까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현장에서 권하고 또 가격을 민중적 유통구조에 맞춰 1000원으로 매겼어."

그렇게 용케 2000권 보급하면 200만 원. 인쇄비가 100만 원 남짓 들었으니 적자는 안 나게 메꿔내곤 했다.

주민등록 말소되고 13년, 고독사 위기도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고 수많은 교사가 해직당했다. 그들이 복직 투쟁할 때 그도 함께했다. 전교조 전남 소속으로 서울 집회도 함께하고,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보름간 단식투쟁도 함께했다. 하지만 나중에 복직 신청하려고 보니 그는 전교조와 달랐다. 80년 국보위 사건이었고, 그에 앞서 유신시대 긴급조치 위반이었던 것. 긴급조치가 위헌 판결을 받기 전에는 복직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노무현 정권 들어서 민주화 유공자 포상을 할 때도 그는 제외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고생한 1140명이 모두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렇게 그는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항상 함께 했다. 그러다가 2000년 그의 모친이 별세했다. 그때부터 그는 석전동에 쪽방을 마련하고 생활했다. 누구에게도 그의 숙소는 알리지 않은 채.

"혼자 사니까 돈 들 일이 없더라고요. 세금 내는 것도 아니고 하니…."

어느 해 겨울.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뜻으로 한겨울에도 난방이나 전기장판 없이 냉방에서 그냥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겨레하나 회원인데 송년회 한다고 오라고 전화는 왔는데 몸이 못 일어나는 거야. 거처를 공개 안 했으니 찾지를 못하는 거지."

보름 뒤 겨우 몸을 털고 일어나 나가니 마산시청에 근무하던 임종만 씨가 공무원 노조 사무실로 데려가서는 격려금이라며 5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더라고 했다. 주변에서는 '유시인 돌연사 고독사 하겠다'며 걱정이 많았다는 얘기도 그때야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민등록 말소된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2013년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있고 나서 구제 신청을 하려고 보니 말소돼 있었다.

"할 수 있습니까. 벌금 8만 원 내고 주민등록 복원한 뒤 재심 신청을 했어요. 그게 2년을 끌고 있네요."

그 골방에서 그는 14년을 살면서 시집 13권을 냈다.

문학협동조합 통해 이바지하고 싶어

그는 요즘 양덕1동에 '시인의 집'을 열고 신혼의 달콤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사실 인터뷰는 처음부터 그와 결혼할 띠동갑 신부 김명자 씨와 함께했다. 경민인터빌 상가 1층에 김 씨가 경매로 받아놓은 작은 상가가 있었는데, 여기에 시인의 집을 열고, 문학협동조합 준비 기금 마련을 겸해서 김 씨가 판매하는 몇몇 농산물 등을 전시해두고 있다.

"민주화, 노동운동에 많은 관여를 해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 문학을 가지고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협동조합이더라고. 나중에 여건이 되면 내가 일단 돈을 많이 대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한 5000원이나 만 원 해서 받고 문학협동조합을 만들 생각입니다.

옛날 <마산문화>처럼 무크지 한 100페이지 정도로요. 이런 잡지를 내서 사람들을 발굴해내기도 하고요. 옛날에 나도 <마산문화>에 발굴돼서 등단을 하고 시집도 내고 한 것이니 나도 신인 발굴해내고 신세도 갚고, 지원하고 지역 문화예술 이런 부분에 초점 맞춰 제대로 하려고요."

문학의 밤이나 시화전, 문학강연, 문학기행 같은 것을 해볼 생각이다. 정예로 5명 정도 모아서 그들과 함께 방향을 잡아갈 생각이다.

"이름을 공동체문학협동조합이라 해서 공동체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향에서 우리 문학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 예를 들어 오래 살아오신 동네 어른들 일대기 간단한 평전도 써드리고, 때로는 상인들과 골목 세계 르뽀도 좀 하고. 그런식으로 공동체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려고요."

그가 이런 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도, 결혼을 마음먹은 것도 긴급조치 위헌 판결이었다. 얼마가 되든 보상을 받으면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고 살게끔 할 수 있겠다는 자신도 생겼고, 문학운동을 본격적으로 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올 가을쯤이면 재심 청구 심판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천주교 신자로서 성당에서 성혼미사도 올리고 할 생각이다. "시집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라는 시인. 앞으로도 계속 시로, 문학으로 지역사회와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